대기업 이동통신사의 콜센터 상담원 오모(29)씨는 지난해 1월 겪은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떨린다. 고객센터를 찾은 이모(56)씨가 "염산을 뿌려 얼굴을 녹여버리겠다"며 갈색 병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다른 직원들이 급히 말렸지만 이씨는 "상담원이 고객을 대하는 태도가 불손하다, 휴대폰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새 제품으로 바꿔달라는 데 왜 바꿔주지 않느냐"며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쏟아냈다. 1시간 넘게 행패를 부리는 이씨의 행동에 놀란 오씨는 급한 대로 위로금과 함께 휴대폰 요금을 대신 내주기로 하고 이씨를 돌려보냈다.
며칠 뒤 이씨는 다른 이동통신사 콜센터를 찾아갔다. 이번에도 '욕을 하지 말아달라'는 상담원의 말을 꼬투리 잡았다. 이씨는 "욕 하는 걸로는 감옥에 가지 않는다. 너 모가지가 몇 개냐. 본사에 알리겠다"며 상담원들을 향해 야구방망이를 마구 휘둘렀다. 직원들은 결국 이씨의 요구대로 돈을 건네는 것으로 일을 무마했다.
이씨는 자신과 가족 지인 명의로 된 휴대폰 22대를 갖고 번갈아 가며 정지, 해지, 개통하기를 반복하고 수시로 수리를 의뢰했다. 이 과정에 꼬투리가 잡힌 상담원이나 콜센터 책임자들이 최근 3년 간 대납한 이씨의 휴대폰 요금만 500만원이 넘을 정도다.
이씨는 상담원들 사이에 악명 높은 '블랙컨슈머'(금전적 보상을 목적으로 악성 민원을 제기하는 고객)였다. 한번 전화를 했다 하면 1~2시간은 기본이었고, 욕설과 폭언도 서슴지 않았다. 지난해 3월에는 또 다른 콜센터 상담원 김모(38)씨와 장모(35)씨를 자신이 살고 있는 전남 목포로 불러 사과를 받아낼 정도였다.
이씨는 기업들이 회사 이미지를 고려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점을 악용해 2년 넘게 이 같은 일을 계속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수 없는 이른바 '감정노동자'인 상담원들은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했다. 고객으로부터 항의민원이 접수되면 본사로부터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우려한 나머지 속앓이만 했다. 실제 이씨를 상대했던 한 상담원은 스트레스와 심리적 불안을 견디지 못해 최근 퇴사하기도 했다.
이씨는 휴대폰에 그치지 않고 냉장고 TV 등 전자제품의 하자를 빌미로 블랙컨슈머 행각을 벌여왔다. 이씨가 이를 통해 대기업 콜센터 직원과 서비스센터 등으로부터 뜯어낸 금품은 2010년 3월부터 올해 6월까지 206회에 걸쳐 2억4,000여만원에 달한다.
경찰에 따르면 이씨는 2010년 3월 컴퓨터에 들어있는 자료를 다른 기기로 옮겨달라고 한 뒤 자료가 유실됐다며 597만원을 받아내기도 했다. 지난해 6월에는 냉장고의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켜 놓은 뒤 새 제품으로 교환 받고는 냉장고 안에 들어있던 백두산 상황버섯 등 귀한 음식이 상했다며 2차례에 걸쳐 1,000만원을 받아냈다. 결국 견디다 못한 대기업이 결국 경찰에 신고하면서 대기업을 상대로 한 이씨의 거머리 행각도 끝이 났다. 경찰은 11일 이씨에 대해 상습사기와 갈취, 폭행 혐의로 구속했다.
이동현기자 nan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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