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서울 신촌의 한 유명 영어학원 토익 스피킹 시험준비반 강의실. 강사와 수강생이 대화를 주고 받는 일반적인 영어회화반과 달리 강사 혼자 열강을 하고 있을 뿐 수강생들은 강사가 일러주는 '족집게 답안'을 받아 적기 바빴다. 강사는 "사진 묘사, 해결책 제안하기 등 11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7~8분"이라며 "회화 실력보다는 전략과 순발력이 중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강사 말대로 요즘 영어 말하기 능력평가 시험은 실력보다는 전략이다. 취업준비생인 이모(27)씨는 토익 960점을 받았고, 6개월 동안 캐나다 어학연수까지 다녀왔지만 최근 치른 토익 스피킹 성적은 중간 수준인 5급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씨는 "영어회화를 잘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정작 시험에서는 정해진 답변유형을 익히지 않고서는 쉽게 답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반면 올 초 또 다른 영어 말하기 능력평가 시험인 오픽(OPIc, Oral Proficiency Interview-computer)을 혼자 준비해 '중하' 등급을 받았던 취업 준비생 구모(26)씨는 월 수강료 30만원 하는 학원에서 족집게 강의를 들은 뒤 두 달 만에 대기업 지원 최저기준인 '중' 등급을 얻었다. 구씨는 "답변요령만 외우면 점수가 나오는 이런 시험을 기업에서 왜 요구하는지 모르겠다"고 씁쓸해 했다.
한국토익위원회가 주관하는 토익스피킹(최하 1등급~최고 8등급)과 크레듀가 주관하는 오픽 등 영어 말하기 능력평가 시험이 대기업 응시 지원조건이 된 것은 2007년. 삼성이 필기시험만으로 영어능력을 제대로 평가하기 어렵다며 이 시험들을 도입한 이후 대기업들과 공기업들이 우후죽순처럼 쫓아 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대기업 지원과 승진의 필수코스가 된 영어 말하기 시험에 응시한 인원은 올해만 51만 명. 해마다 폭증 추세다.
그러나 이들 시험이 몇몇 정해진 유형에서 문제가 출제되다 보니 수험생들 사이에서는 '복불복'시험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진짜 실력이라기보다 외운 유형의 시험문제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점수 편차가 크기 때문이다. 한 외국어학원 관계자는 "토익 스피킹은 기초 영어능력만 있으면 두 달 안에 대기업 입사 커트라인 등급을 딸 수 있다"며 "자신이 외운 유형들이 많이 나오면 높은 등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여러 차례 시험을 본다"고 귀띔했다. 한번 응시료는 대략 8만원이지만 어쩔 수 없이 수 차례 응시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대기업 인사담당 관계자는 "토익 스피킹 등으로 말하기 능력을 평가하는 데 한계가 있지만 시간과 비용 문제로 지원자 수 천 명의 실력을 평가할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경희대 한학성 교수(영어학부)는 "영어 말하기 능력을 형식적으로 평가할 의사가 아니라면 대면평가를 적극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지용기자 cdragon2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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