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장소는 을지로4가역이었다. 버스를 타고 종로4가에서 내려 을지로까지는 걸어가려 했는데, 졸다가 정류장을 놓쳐 종로2가에서 내리고 말았다. 조금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종로라니. 종로를 걷는 게 얼마만인지. 언젠가 한 술자리에서는 종로에 대한 성토가 말놀이로 이어졌다. 종로엔 이제 가위바위보 오락기가 없어. 종로에 갈 맛이 안 나. 종로엔 점집도 없어졌어. 종로엔 김떡순도 없어. 종로엔 피맛골도 없어. 종로엔 단성사도 없어. 이제는 없는 것 투성이의 종로.
종묘 앞에서 길을 건너 세운상가로 접어든다. 로보트태권브이가 버티고 선 청계천을 지나 다시 상가의 샛길을 걷는다. 온갖 부품들이, 아직은 간신히 가게마다 빼곡하다. 이 일대를 무대로 이십 년 전 유하는 청춘의 시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를 썼다. 몇 년 전 황정은은 쇠락과 소멸의 이야기 '백의 그림자'를 썼다. 올해는 김기덕의 영화 '피에타'가 만들어졌다. 이 영화가 당장에 떠들썩했던 건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때문이지만, 먼 후일엔 이 곳의 좁고 어둔 골목들을 담은 마지막 영상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는 울적한 예감이 스친다.
두리번거리며 걷다가 퍼뜩 약속 장소와 시간을 다시 확인해 본 건 청계천을 건넌 후였다. 장소는 을지로4가가 아니라 을지로입구. 시간은 3시가 아니라 4시. 아무래도 오늘의 운세는 착오가 안성맞춤, 오늘의 숨은 일정은 이제 없는 것과 아직 있는 것의 사이를 통과하는 일이었던 듯하다.
신해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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