웸블리 스타디움 서보지 못하고 관중석서 시상식 보니 기분 묘해
축구협회·피켓 준 관중 원망 없어 프로선수로 규칙 몰랐던 내 잘못
인증서·연금 혜택도 받고… 세리머니로 얻은 게 더 많아
이번 일 겪으며 강해진 느낌 공인으로 행동 더 책임지려 노력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6일 박종우(23ㆍ부산 아이파크)국가대표 축구선수의 `독도 세리머니`에 대한 심의에 들어갔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3일 '독도 세리머니'를 올림픽 대회 규정을 위반한 정치적 시위로 판단하고 박 선수에게 A매치 두 경기 출전 정지와 3500스위스프랑(410만원 정도) 벌금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제재를 내린 데 따른 후속조치이다. FIFA가 출전을 금지한 경기는 2014 브라질월드컵 최종예선 2경기로 박 선수는 2013년 3월 26일 열리는 카타르전과 이어 6월 4일 치러지는 레바논 원정경기를 못 뛰게 된다. 박 선수는 8월 11일 영국 웨일스 카디프 밀레니엄스타디움에서 열린 일본과의 2012 런던올림픽 축구 동메달 결정전에서 2대0으로 승리한 뒤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적힌 종이를 운동장에서 펼쳐든 후 올림픽 규정을 위반했다는 논란에 시달려왔다. 일본의 옛지도에도 조선땅으로 표시된 곳, 해방 이후 한국땅이라고 가르쳐왔으면서 정작 국제외교무대에서는 이 문제를 설득하지 못한 채 한일전 불과 하루 전(8월 10일)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함으로써 국제적인 분쟁을 초래하고는 젊은 축구 선수 혼자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 한 4개월간의 가혹한 상황이 그나마 끝이 난 것. 박종우 선수가 이제야 입을 열었다.
-징계 결과에 대해서 만족하세요?
"일단 생각보다는 수위가 낮아서 다행이에요. 그동안 악몽도 많이 꾸고 좋게 되겠지 좋게 되겠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매일 기도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다 내려놓겠다, 어떤 결과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게 마음 먹었거든요. 이제 막 에이대표(성인 국가대표)로 올라갔는데 내년 6월 경기까지 못 나가니까 그건 굉장히 안타깝지요. 국가대표는 경기마다 선수를 소집하는 것이라 한번 지명된다고 계속 있는 건 아니거든요."
-억울하겠어요.
"아니요. 제 나이대면 제가 알아서 생각을 해야 하는데 제가 한 거잖아요."
-선수의 편을 들지 못하고 우왕좌왕한 축구협회나 대한체육협회의 잘못도 있지 않나요? 일본계 미국인인 IOC 연락관 때문에 부풀려졌고 우리 쪽에서 대응을 잘못해서 문제가 커졌다는 말도 많았잖아요.
"그건 저희 부모님들이 저를 가르치는 걸 가지고 다른 분들이 너는 왜 이렇게 가르치냐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대한축구협회와 대한체육회 분들이 어떻게든 저를 챙기고 사태를 줄여보려고 한 행동들인데 그것들이 조금 오차가 생긴 거거든요. 시상식에 안 내보내고 귀국해서 만찬회에 안 내보내려고 한 것도 노출을 적게 해서 잠잠해지게 하려고 했던 부분들이라고 생각해요."
-8월 11일 정확히 어떻게 된 일이에요?
"허~ (깊은 한숨) 경기가 끝났고 이겼고 날아 갈듯이 좋아서 선수들끼리 다 세리모니를 한 상황이었는데 어느 한 분이 저를 부르시더라구요. 갔더니 피켓을 주셔서 아무 생각없이 든 거 같아요. 한국인이라면 누구든, 제가 아니라 어떤 선수였더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들었을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교육을 받아왔고 이 걸 들면 큰일난다는 생각은 아예 못했지요. 오히려 자부심을 가지면 가졌지. 대통령님이 독도에 갔다는 것도 아무도 몰랐거든요. 그걸 들고 운동장을 몇 발자국 걸어갔는데 협회 직원분이 '안된다, 내려라' 소리를 치셔요. 그래서 급하게 내렸어요."
-내리는 순간, 잘못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어, 왜 그러지? 뭐가 있나 잠시 생각했지만 금방 잊었어요. 그 다음날까지도 몰랐어요. 다음날 시상식을 하러 버스를 타고 가는데 한국에서 아는 사람이 전화를 했어요. '시상식 불참 기사가 떴다' 그러는 거예요. (기)성용이 형이 룸메이트인데 형한테 '저 시상식 불참한다는대요'하니까 '아, 뭔말이냐' 해요. 분위기도 아무렇지도 않아서 전화에 대고 '루머인 것 같다' 그러고 웸블리 구장으로 갔어요. 도착해서 대한체육회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대한축구협회 직원이 저를 따로 부르더니 '오늘 시상식에는 못 올라갈 거 같다' 이야기를 해주시더라고요. 일단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지요. 기분 좋은 날 저로 인해 분위기가 안 좋아질 수도 있는 거니까. 시상식이 열리면 선수들은 운동장 안 시상대에 올라가고 코칭스태프는 라인 밖 잔디에서 사진을 찍고 그러거든요. 저는 런던올림픽조직위에서 운동장에를 아예 못 들어가게 하고 관중석 맨 위로 보내더라구요. 그날이 브라질이랑 멕시코랑 결승전이었는데 관중 속에 섞여서 시상식을 봤어요.(웃음)"
-기분이 어땠어요?
"묘~~하더라구요. 섭섭한 건 없었어요. 제지가 들어온 걸 보면 제가 규칙이라는 걸 모르고, 하면 안되는 행동을 한 거니까요. 아쉬운 건 굉장히 많았지요. 축구선수로 웸블리 스타디움에 서본다는 건 일생에 한번? 아니 반번이나 있을까 말까 한 기회인데 거기서 동메달을 걸어볼 수 있다는 행복을 못 느끼니까 그게 좀 힘들고 안타깝더라구요."
-피켓을 준 분에 대한 원망은 없었어요?
"없었다면 거짓말이지요. 잠깐은 있었어요. 그 순간 왜 나였을까. 그런데 제가 걸어가서 제가 받아서 제가 들어올린 거니까 그분한테는 원망 안하고 그 분도 미안해 하고 있을 거라고 믿어요. 누군지도 모르고 그 후 연락을 받은 적은 없어요."
-시상식 끝나고 돌아와서 다른 선수들은 뭐래요?
"다들 화기애애하게 들떠 있는데 제가 심각성을 말하면 찬물을 끼얹는 거잖아요. 아, 메달좀 만져보자, 그러면서 깨물어도 보고 그랬어요. 다들 메달 갖고 사진을 찍으니까 소외된 느낌을 조금은 받았지만 어쩔 수 없었지요. 방으로 돌아와서 성용이형한테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형이 '괜찮다. 너는 독립투사다. 한국 가면 많은 분들이 힘을 줄 거다' 그랬어요."
-그래서 마음이 놓였어요?
"아니요. 런던에 있을 때는 굉장히 힘들었어요. 버스에서 전화 받고는 전화를 꺼놓았거든요. 그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몰랐어요. 성용이형은 아마 스마트폰으로 알았던 모양인데 저는 사람들 기분을 망칠까 봐 내색도 않고 혼자서 끙끙 앓았어요. 잠도 잘 못자고. 제가 생각이 무지 많거든요. 한국에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멘탈붕괴였어요. 메달 못 받게 되면 어떻게 되나, 군대도 가야 하고 뛴 게 뭐가 되나. 근데 한국 도착해서 핸드폰을 딱 켜고 본 거예요. 페이스북도 보고 인터넷 기사 댓글도 읽고. 저를 응원하시는 분이 정말 많은 거예요. 집에 갈 때까지 핸드폰만 봤어요. 그때 조금은 가라앉았던 거 같아요."
-그래도 다시 메달을 못 받는다 어쩐다 할 때마다 마음 졸였겠어요.
"처음에는 신기했어요. 제가 갑자기 이렇게까지 모든 분들의 관심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거든요. 런던에서 받았던 충격이 한국 도착해서 약간 내려가고 있었는데 메달 박탈을 당할 수도 있다 하니까 다시 최고조까지 올라간 거지요. 와~ 그때는 뭐 계속 집에만 있었던 거 같아요. 감독님이 만찬회에 오라고 하신 날에만 서울 가고."
-어떻게 이겨냈어요?
"힘 내라고 편지도 주시고 선물도 보내주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직접 찾아오시는 분들도 많고요. 저희 팀에 런던올림픽에 출전한 선수가 세 명(이범용 김창수) 있는데 런던올림픽이 끝나면서 팬이 많이 늘었어요. 불안할 때는 제가 이 경험에서 뭔가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초등학교와 중학교 감독님은 자유롭게 축구를 하도록 버려두었기 때문에 제가 무서운 게 없었어요. 고등학교 가니까 감독님이 저를 잡으시더라고요. 처음에는 힘들었어요. 고 1때 친구 아버님이 목사님이라 교회에 갔는데 사람들이 막 울고 소리치면서 기도를 해서 적응이 안되더라고요. 그런데 한 달 뒤에 제가 딱 그러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감독님이 안 잡아주셨으면 제가 지금처럼 안됐을 것 같아요. 건방져 가고 있을 때 감독님이 절제를 일러주셔서, 대학 가니까 또 자유롭게 풀어주시고. 제가 그래서 풀어질 것 같으면 그때를 생각하고 힘들 때면 스스로를 풀어주려고 해요. 그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거든요. 이 세리모니를 통해서도 저로 인해 한국 모든 축구선수가 그런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됐잖아요. 독도는 우리땅이다, 그 말은 당연한 것이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하니까프로선수라면 경기장에서 지켜야 할 행동이 있다고 생각해요."
-귀국해서는 광고나 방송출연 제의도 쏟아지지 않았어요?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다 거절했어요. 결과가 나오지 않았는데 그렇게 행동하면 안되잖아요."
-축구는 어떻게 시작했어요?
"(경기 용인) 왕산 초등학교 3학년 때인데 학교로 포곡 초등학교 전복식 감독님이 오셨어요. 아침 일찍 학교 가서 볼 차고 점심 먹고 볼 차고 다 그러잖아요. 감독님이 저더러 볼을 차보라고 하더니 부모님을 만나셨어요. 아버지는 돈도 많이 드는데 도와줄 형편이 안되니 하지 말라 그러셨어요. 제가 힘들어도 안 오겠다, 성공할 때까지 하겠다니까 보내주셨어요. 포곡초등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어요. 아버지가 건설 일을 하셨는데 제가 떠나니까 8살 위 누나까지 가족이 원주 고모네로 가서 엄마는 가게 일을 하고 아버지는 일 다니시고. 초등학교 축구선수들은 토요일이면 집으로 가서 일요일에 오거든요. 추석이나 설 연휴 같은 때도 집으로 가고요. 저는 그 때도 기숙사에서 감독님이랑 있었어요. 감독님이 용돈도 주시고 축구화도 사주셨어요. 엄마 보고 싶다고 우는 선수들도 있지만 저는 안 그랬어요. 제가 어려서부터 좀 강했던 거 같아요. 초등학교만 그런 게 아니라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연세대) 때도 홍명보 감독님도 언제나 지도자님들이 저를 유난히 잘 챙겨주셨어요. 제가 불쌍해 보이기라도 하는 걸까요?(웃음)"
-그런데 왜 프로로 안 가고 대학으로 갔어요?
"가정형편이 그다지 좋지 않으니까 빨리 프로에 진출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연세대 신재흠 감독님이 저를 딱 찍어놓으셨다고 하더라고요. 대학가길 잘했다 생각해요. 체육교육과였는데 교양수업도 다 들어가고 시험도 다 쳐야 하고 진짜 배운 게 많아요. 미팅도 세 번이나 하고. 제가 수줍음을 많이 타서 인기는 별로 없었어요. 곧바로 프로로 온 친구들은 다 대학생활을 부러워해요. 웨이트트레이닝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왜소했던 몸이 그때 좋아지고 아프지도 않았어요. 감독님이 한약도 지어주시고 잘 챙겨주셨는데 2년만 다니고 프로로 와서 지금도 죄송해요."
-이번 일을 통해 얻은 것과 잃은 게 있다면?
"결과가 계속 미뤄지면서 생각을 정말 많이 했잖아요. 그러면서 제가 강해졌어요. 모든 걸 내려놓았다는 건 포기했다는 뜻이 아니라 내 자신을 믿을 수 있으니까 어떤 일이 닥쳐도 다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거거든요. 전에는 박종우 개인이었는데 이제는 아, 독도 그 사람, 런던 올림픽에 나가서 메달 딴 선수 하고 알아보니까 공인으로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연금혜택도 이미 받고 있고 메달인증서도 받았어요. 메달이 없는 건데 전에 이영표 선수가 인터뷰에서 그랬어요. 이사 다니다가 메달을 잃어버렸는데 박종우 선수도 그렇게 생각을 하라고요."
-시민들이 메달을 만들어준다는 말도 있었는데 받았어요?
"받지는 않았는데 저를 위해 모금까지 했다는 점이 너무 감사하지요.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려요."
서화숙 선임기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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