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O 상무’
사무실에 명패가 들어왔다. 이제 실감이 난다. 지난 주 그는 입사 20년 만에 꿈을 이뤘다. 임원이 된 것이다. 누구나 동경하지만 아무나 될 수는 없다. 확률로 치면 1%, 100명의 입사자 가운데 단 1명 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이다. 두 배 이상 뛴 연봉과 달라진 대우, 부와 명예를 동시에 움켜쥔 기분이다. A상무는 벌써 수십 번 이 말을 흥얼거리고 있다. ‘나는 임원이다!’
같은 날 B상무는 아직 머리가 아프다. 전날 마신 술이 깨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 30분 뒤에는 차를 타고 한 시간 뒤엔 사무실에 앉아 있어야 한다. 며칠 전까지는 그랬다. 아직 믿기지 않는다. 불과 2년 전 그는 40대 후반의 나이에 임원으로 승진했다. 모두가 부러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모든 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부장 때보다 더 일을 했지만 도무지 성과가 나지 않았다. 운도 따르지 않았고, 견제도 많아졌다. 첫해는 무사히 넘겼지만, 결국 올해는 방을 비우라는 통보가 날아들었다. 1년 정도는 자문역이란 이름으로 현직에 준하는 월급을 받겠지만, 업무도 권한도 없는 사실상 ‘백수’다. 이제 갓 쉰을 넘긴 나이, 자꾸 ‘일장춘몽’이란 말이 아른거린다.
임원은 ‘샐러리맨의 꽃’이다. 그만큼 화려하다. 대기업 임원은 더욱 그렇다. 초임 상무라도 최소 연봉 1억5,000만~2억원 은 보장받는다. 승용차 지원에 별도의 사무공간, 법인카드, 골프회원권도 따라온다. 달라지는 예우만 수십여 가지. 월급쟁이로 살면서 이런 호사를 누리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일 까. 임원이 되는 것은 로또당첨 만큼이나 어렵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전국 250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신입사원이 임원이 되기까지 평균 21.2년이 걸리고, 임원까지 오를 확률은 0.8%다.
하지만 화려하기만 해서 꽃은 아니다. 여기엔 ‘쉽게 꺾인다’는 뜻도 담겨 있다. 임원이 되는 순간 고용 불안의 수렁에 빠진다. 어느 것 하나 보장된 것은 없다. 연말인사 때마다 승진이냐 유임이냐 탈락이냐, 세 갈래 길에 놓이게 된다.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 아니 조기 탈락하지 않기 위해, 회사에 더 충성해야 하고 더 일해야 한다. 가정사는 자연 뒷전이 되고, 불면증과 두통 같은 ‘임원병’도 따른다. 연말 인사시즌이 다가오면 더욱 더 그렇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화려한 임시직’이라고 부른다. 별을 달고 몇 년 만에 옷을 벗게 된 임원들은 한결같이 “월급쟁이는 짧고 굵게 사는 것보다 가늘고 길게 가는 게 최고”라고 말한다.
올 연말 정기 인사에서도 기업마다 수십~수백명의 임원이 새로 탄생하고 있다. 고졸 신화, 30대 젊은 피, 우먼 파워 등 대기업 인사 때면 수많은 휴먼스토리들이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승진자 만큼의 현직 임원들이 옷을 벗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구에겐 12월이 축복의 계절이지만, 다른 누구에겐 잔인한 계절일 수 밖에 없다.
유환구기자 red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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