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오후 6시20분 경북 구미시 봉곡동 경구고 본관1층 특별교실. 빈 교실 앞쪽 책상 위엔 주인 없는 가방들이 수북이 놓여있었다. 덩치는 산만하지만 앳된 얼굴의 학생들이 곧 하나 둘 교실로 들어섰다. 정규수업을 끝내기 무섭게 이 교실에 가방을 놓고 교내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다. 가방부터 갖다 놓은 것은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은 2학년 10개반 학생 중 내신 9등급에 해당하는 50명을 뽑아 방과 후 수업을 받도록 하는 일명 '꼴찌반'이다. 방과후 교실로 마련된 꼴찌반 1교시 수업은 오후 7시20분에야 시작되는데도 1시간 일찍 온 학생들이 예ㆍ복습을 하느라 정적만 감돌았다.
이날 수업은 EBS 기초다지기의 기초영어구문이해. 지도교사는 영어 기초구문을 설명한 뒤 문제를 던졌고, 학생들은 서로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으며 정답을 찾아냈다. 여느 교실에서 볼 수 있는 졸거나 잡담하는 학생은 전혀 없었다. 이들은 수업시간 종료 인사로 "9등급 탈출, 6등급 진입"을 목놓아 외쳤다.
29일 교육과학기술부가 발표한 '2012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에서 전국 고교 중 향상도가 수위에 든 비밀은 바로 꼴찌반에 있었다. 경구고는 지난해 기초학력 미달 학생이 영어 27명, 수학 12명, 국어 4명에 달했으나 올해는 한 명도 없었다. 과목별 향상도는 영어 1위, 수학 2위, 국어 4위다. 또 지난해에는 영어 114명, 수학 88명, 국어 84명이 상중하 중 하(기초) 그룹에 속했으나 올해는 국어에서 6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중(보통) 이상의 성적을 받아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 같은 일이 가능해진 것은 올초 학교 측이 학교운영위원회와 학생 대표를 만나 '학과목 수준별 선택 수강 및 성적 부진학생 특별반 운영'을 합의하면서부터다. 학생과 학부모들 스스로 꼴찌반에 들어가겠다고 동의했고, 학교는 사설학원에 다닐 필요가 없게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따라 10개 반에서 각각 성적 하위 5등 이내 학생들이 방과 후 특별교실에서 2교시 80분 수업을 들었다.
초기에는 출석 거부 등 반발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학생들은 스스로 "합의사항 준수"를 외치며 이를 극복했다. 선배 대학생들이 멘토로 나서 꼴찌 학생들과 일 대 일 대화를 나누며 자극을 준 것도 힘이 됐다.
이 학교 2학년 김모(17) 군은 "학년 초에는 친구들이 꼴찌반에 들었다며 손가락질을 하는 것같아 매우 힘들었지만 이렇게 애쓴 결과 다음 달이면 6등급 이상 반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됐다"며 활짝 웃었다.
경구고 이영호 교감은 "꼴찌들의 동의를 받은 꼴찌반 운영으로 학생들이 꼴찌에서 벗어나게 됐다"며 "학생과 학부모, 학교가 합심한 결과"라고 말했다.
김용태기자 kr888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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