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말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은 66조원이었다. 당시는 리먼사태로 야기된 미국발 금융위기로 세계 경제가 수렁에 빠져들던 시기. 해외 전문가들은 월가의 금융 쇼크와 IT 버블 붕괴를 목도하며 삼성전자 역시 위기의 후폭풍을 비껴가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최후의 승자는 삼성전자였다. 삼성전자는 이듬해 영업이익 10조원을 돌파하는 새 역사를 쓰며 세계 전자업계의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4년이 지난 현재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은 208조원에 달한다.
현대자동차도 2008년이 분수령이었다. 포드 GM 등 미국자동차 회사들이 줄줄이 공적자금 수혈로 연명하고, 도요타 등 일본자동차 회사들은 리콜과 엔고충격에 허덕이는 사이 현대차는 그 빈틈을 빠르게 파고들었다. 현대차는 글로벌 위기를 통해 오히려 '빅5'반열에 오르게 됐다.
정확히 15년 전 우리나라가 건국이래 최대 경제위기를 맞았을 때, 국내기업들은 만신창이였다. 하지만 불과 10년 뒤 찾아온 글로벌 위기에선 오히려 믿기 힘든 '점프'에 성공했다. 대체 10년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고, 국내 기업들의 도약능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위기를 견디는 DNA'가 생겼다고 말한다. 다른 글로벌 기업들보다 10년 앞서 위기를 경험했고, 먼저 구조조정을 한 덕분에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뒤 이은 유럽재정위기를 견뎌낼 수 있는 '위기면역세포'가 생겼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재무적 안정이다. 대마불사(大馬不死)의 불문율 하에 겁 없이 빚을 썼던 1997년 우리나라 상장기업들의 평균부채비율은 400%에 육박했다. 하지만 IMF사태 기업구조조정을 통해 가장 먼저 빚감축에 나서면서 15년만에 부채비율은 171%까지 줄었다.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등 4대 기업의 부채비율은 100%를 약간 웃도는 수준이다. 대신 현금 보유액은 22조원에서 57조원으로 크게 늘었다. 한 대기업 재무담당자는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비로소 빚의 위험과 현금의 위력을 깨달았다. 빚 적고 현금만 비축해 놓으면 위기는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고 말했다.
IMF 사태를 겪으며 외형경쟁이 더 이상 불가능해지자 기업들은 생존의 해법을 수익성에서 찾았다. 부가가치가 높은 핵심사업에 집중하면서 기술력(R&D)과 품질, 수출을 통해 이익을 내는 방법을 터득한 것. 환란 학습효과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통해 나타났다.
현대차는 2000년대 중반 원화강세가 지속되자 곧바로 해외 공장 증설에 나섰고,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별다른 비용 부담 없이 생산성을 높일 수 있었다. 그 결과 2007년 각각 69조6,000억원, 2조8,480억원을 기록했던 현대차의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이듬해 79조7,363억원, 3조720억원으로 외려 증가했다.
삼성전자는 2009년 IT 불황이 오자 LCD보다 100만원 이상 비싼 LED TV를 출시하는 고급화 전략으로 맞섰다. 반응은 선풍적이었다. 삼성의 승부수는 순식간에 LED 신드롬을 일으키며 평면TV 시장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놨다. 김병도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97년 환란은 역설적으로 삼성 현대차 SK LG 등 '글로벌 슈퍼스타'의 탄생을 견인하는 기폭제가 됐다"며 "위기에 대한 면역력이 생긴 덕분에 당황하지 않고 공격적 마케팅을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한득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IT 자동차 석유화학 등 수출주력 업종이 승승장구한 배경에는 고환율 정책의 뒷받침 등 운도 따랐다"며 "하지만 최근 유럽 재정위기에서 보듯 위기의 주기가 짧아지면서 대기업과 수출기업의 부채상환 능력이 악화하고 있는 만큼 기업들에 또 다른 시험이 닥친 셈"이라고 말했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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