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누구에게나 하루 24 시간이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지만, 정작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그 시간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사회적 경쟁이 격화되고 경제적 보상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는 상황에서, 개인에게 사적으로 허용되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경쟁에서 이겨내기 위해서 남들보다 더 일해야 하고,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과거보다 더 많은 시간 동안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입시에 비유하자면, 입학의 경쟁률과 시험의 난이도가 동시에 치솟는 형국이다.
개인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주관적 시간이 감소함에 따라, 관심 분야의 책을 읽고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은 그에 비례하여 줄어들 수밖에 없다. 올해를 문화체육관광부가 독서의 해로 선포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불행히도 책은 사람들로부터 점차 외면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일만 하는 바보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책을 펼칠 여유를 잃어버린 대신,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지식의 또 다른 소비 형태를 끊임없이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우리들이 찾아낸 것은 소위 '강의' 이다.
확실히 최근 눈에 띄는 문화적 흐름 중의 하나는 '강의 열풍' 이다. 그리고 이 열풍의 진원지에 인문학 강의들이 있다. 기업과 정부 부처에서, 그리고 백화점과 구청 문화센터에서 다양한 인문학 방면의 강의들이 넘쳐나고 있다. 텔레비전도 하루 종일 경쟁적으로 유사한 강의들을 방송하고 있다. 바야흐로 강의의 시대이다. 글을 쓰는 사람들도 이제는 필자라는 말보다는 강사라는 말을 더 사랑하는 것 같다. 우선 수입 면에서 볼 때도 강의 몇 번이면 책을 내서 받는 어설픈 인세를 상회하고도 남음이 있다. 많은 이들이 책 집필 보다는 강의에 집중하고 있으며, 책을 출간하더라도 강사로서 자신의 지명도를 제고하고자 하는 경우가 아주 많아졌다. 물론 단순히 돈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원고와 외롭게 몇 달간 씨름하는 것보다 청중들 앞에서 그 반응을 즐겨가며 마음껏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는 것이 훨씬 신나는 일임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렇게 모두들 강의를 찾아나서는 것은 그것이 무엇보다 빠르고 효율적이고 즐겁기 때문이다. 두 시간 남짓 귀를 기울이는 일만으로 르네상스 미술의 흐름을 잡어내고, 서양 철학사에서 자유의 의미의 변천을 이해하며, 바그너의 음악 세계 전체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얻을 수 있는데, 이 보다 더 매력적인 일이 어디 있겠는가. 만일 이런 주제들에 대해서 책을 골라 읽는다면, 강사가 전해주는 그 명쾌한 결론들을 스스로 알아낼 방법도 없거니와, 설사 찾아낸다고 해도 아주 수고롭고 고단한 독서의 과정을 거친 후일 것이다.
그러나 냉정히 말해서, 당신이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두 시간 동안 스피노자의 윤리학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고 하더라도, 강의실을 나서는 순간, 그것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한 줄기의 바람에도 산산이 흩어져버릴 수밖에 없다. 누가 내 귀에 넣어준 지식은 근본적으로 나의 지식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덧없이 다른 쪽 귀로 흘러 내려 빠져나갈 뿐이다. 그것은 나의 생각 혹은 나의 언어로 다시 작동될 수 없다. 내가 스스로 구축해낸 지식만이 내 지식이며 나에게 힘을 주는 지식이다. 자전거를 잘 타려면, 자전거를 끌고 나가 직접 안장에 올라탈 일이다. 자전거의 생김새와 구조에 대한 강의를 여러 번 들어도 자전거를 능숙하게 탈 수 있게 되지 않는다. 문제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자신이 직접 그 문제와 부딪혀 씨름해야 한다.
물론 훌륭한 강의들을 듣는 것은 언제나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거기에서 답을 찾았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어느 정도 공부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문제이다. 인문학 강의를 듣는 일은 식당에서 메뉴판을 읽는 일과 비슷하다. 강사는 매력적인 설명을 통해서 어떤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는지, 각 음식들의 맛은 어떠한지, 어떤 음식을 권하고 싶은지 이야기한다. 그 다음 당신이 할 일은 직접 그 음식들을 맛보는 일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책을 펼쳐야 한다. 그리고 아주 느린 속도로 거대한 문제들과 당신 혼자의 힘으로 힘겹게 오랜 시간 동안 씨름해야 한다. 그래야 생각의 힘이 자란다. 세상의 어떠한 감동적인 강의도 책과 힘겹게 씨름한 저 세월들을 대신할 수는 없다.
김수영 로도스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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