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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칼이 소금이 된 남과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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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칼이 소금이 된 남과 북

입력
2012.11.25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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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이나 고기에 소금을 뿌려 절이는 염장은 원래 고문 수법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상처에 소금을 문지르는 고문의 고통이 어떤지는 민물고기에 소금을 뿌려보면 금새 알 수 있다. 좀 지난 얘기지만 이 염장이란 말이 10월 1일 유엔총회에서 화제에 올랐다. 북한 박길연 외무성 부상이 32개국 중 24번째로 북한대표 기조연설을 했는데, 염장 발언이 빠진 것이다. 연설에 앞서 유엔에 제출한 9쪽짜리 연설문 영어본에는 분명 "남측이 최악의 국가적 손실을 겪은 북한 주민의 상처에 소금을 문질렀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 표현은 어감상 하지 말아야 할 비열한 짓이란 점에서 잔인하고 생경한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연단에 선 박 부상은 "남측이 민족의 대국상을 당한 우리 인민의 아픈 가슴에 칼질을 했다"며 소금을 칼로 수정했다. 아마 그는 더 섬뜩한 칼을 선호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국내에는 어찌된 일인지 박 부상이 '칼질'이 아니라 '염장질' 발언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뿐 만이 아니다. "한반도 정세가 한 점의 불꽃이 곧 열핵 전쟁으로 번질 수 있는 세계 최대의 열섬 지역으로 되고 있다"고 한 발언은 "한반도가 불씨 하나로 핵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전락했다"는 말로 바뀌어 소개됐다. 유엔 홈페이지에 공개된 영상을 보면 박 부상의 연설은 14분 남짓 이어졌다. 기조연설은 원래 자국말로 진행되기 때문에 우리말 통역이 필요없는 연설이었다. 하지만 영어본 연설문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실제 박 부상의 연설과는 다른 어감이나 시제, 뉘앙스가 덧씌워졌다. 영어본 연설문 겉 표지에 적힌 '연설과 다를 수 있으니 확인하라'는 문구는 무슨 경위에서인지 무시됐다.

검증영역 밖의 북한, 북한 인사의 연설에 대한 객관성을 따질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북한이 늘 자기중심적 정세 판단과 같은 메뉴의 발언으로 기회를 놓치곤 한 게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하지만 북한을 예의 악당으로 색칠하기 위해 박 부상의 연설을 왜곡한 것은 시점상 적절치 않은 요인들이 많다. 박 부상의 연설은 새 지도자 김정은 등장 이후 첫 유엔 연설이란 점에서 일찍부터 관심거리였다. 북한으로서는 재임에 성공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2기 대북정책 변화를 주시해야 하는 때이기도 했다. 김정은이 자신의 색깔을 보여줄 기회라는 시의성에 주목한 일본은 영어본 연설문과 실제 한국말 연설이 어떻게 다른지 파악하기 위해 한국어 능통자를 본국에서 유엔으로 보냈다. 일본과 달리 말이 서로 통하는 남북은 그 말이 다르게 전달돼도 두 달 가까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있다. 서로 대화할 필요마저 사라진 현실이 유엔이라고 예외는 아닌 것이다. 관계가 소원하지 않을 때 남북은 유엔에서 식판 외교까지 하며 대화했다. 남의 눈에 띄는 회동이 아니라 유엔 건물 내 식당에서 식판을 마주 놓고 대화를 나누는 비공개, 비공식 접촉이었다.

이번 염장 소동은 교류와 접촉이 끊기면 북한에 대한 분석이 악의적 상상력으로 가득 차게 된다는 한 북한 전문가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박 부상 발언 다음날 우리 외교통상부는 그가 남북관계 악화 책임을 남한 탓으로 돌린 것과 관련해 "전혀 동의할 수 없는 내용임을 잘 알 것"이라는 짤막한 논평을 냈다. 미 국무부는 같은 날 박 부상의 열핵 전쟁 언급에 대해 북한의 자제를 촉구하면서 "미국은 추가도발을 용납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연설 3일 뒤 북한 중앙통신은 박 부상이 유엔에서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이 청산되지 않는 한 핵 문제는 해결되지 않으며, 반 통일세력을 짓부시고 조국 통일을 위한 책임적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고 통일부가 전했다. 서로 보고 싶은 것, 말하고 싶은 것만을 보고 말하며 칼이 소금이 됐다고 해도 불편해 하지 않는 게 지금의 남북 현실이다.

이태규 워싱턴특파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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