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를 두고 한 방송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은 '인간이 만든 지상낙원'이라는 헌사(獻辭)를 붙였다. 말레이반도의 남쪽 끝에 방울처럼 떨어져 앉은 열대의 섬 싱가포르는 국토라야 서울시보다 약간 큰 692.7㎢에 불과한 도시국가다. 하지만 자연은 아름답고 풍성하며, 500만 국민은 1인당 소득이 일본보다 높은 5만714 달러(2011년)의 풍요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인공낙원' 싱가포르의 진정한 면모는 천혜의 자연이나 소득 수준보다도 세련된 사회시스템에 있는지 모른다.
■싱가포르를 낙원으로 일군 사람은 국가 지도자 리콴유(1923~ )다. 그가 총리로서 1965년 말레이시아에서 분리 독립한 싱가포르를 이끌기 전까지 그곳은 식민 잔재와 낙후된 의식, 무질서가 뒤엉켜 있는 동남아의 변방에 불과했다. 식민 종주국이었던 영국에 유학해 케임브리지대에서 법학을 공부한 엘리트 변호사 출신 리콴유에게 부국강병(富國强兵)은 단순한 물질적 번영을 넘어 새 나라에 유럽식 사회시스템을 완벽히 이식하는 것이었다.
■사회시스템을 구성원들의 의식과 제도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일종의 포괄적 행동양식 같은 것으로 본다면, 유럽적 특성을 나타내는 키워드는 합리성, 투명성, 보수적 계층질서, 엄정한 법치 등일 것이다. 리콴유는 '아시아적 권위주의'에 의거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해 제도와 국민성을 불과 30여 년만에 감쪽같이 유럽식으로 바꾸는데 성공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온 나라가 벌금과 태형 같은 '리콴유의 회초리'에 길들여졌다는 것이다.
■오래 전 싱가포르 출장을 앞두고 기대가 컸다. 하지만 도착 사흘 만에 갑갑증이 났다. 도심은 최첨단이고 거리엔 티끌 하나 없었지만, 가면극 무대에 오른 것처럼 사람들에게서 도무지 감정과 표정의 생동을 느끼기 어려웠다. 약속에 5분만 늦어도 큰일이 나고, 지하철에서 껌만 씹어도 벌금을 내는 법규 속에서 톱니바퀴처럼 살아서 그런 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싱가포르 국민이 감정표현이 거의 없는 세계에서 가장 무뚝뚝한 국민으로 꼽혔다고 한다. 인공낙원의 무뚝뚝한 사람들이라니, 왠지 썰렁하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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