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그러지고… 아파하고… 고뇌하고…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입양··왕따·부모와의 불화…미국 보수적 가정의 모습 담아
'건축학개론'의 승민이 '븅신'이라면 의 '크레이그'는 그보다 더한 '등신'쯤 될까. 영화와 만화라는 장르가 다르지만 두 작품은 '작업'의 'ABC'도 모르는 남자 주인공의 순진함이, 젊은 날의 안타까운 연애담이,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서 그런 성장의 과정을 소중한 추억으로 돌이켜보는 정서가 닮았다.
하지만 는 '1990년대' 기억 불러내기로 만족하는 '건축학개론'에 비해 훨씬 문학적이다. 왕따의 고통, 첫 사랑 레이나 부모의 불화, 그 집에 입양된 장애인 형제들 등 현대 미국의 보수 중산층 가정의 일면과 함께 가난하고 엄격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며 주인공이 겪는 성경적인 삶과 현실과의 괴리를 밀도 있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작가(37)의 자전적인 기록이라는 만화의 주인공은, 내면의 선악 갈등을 괴로워하다 결국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힘을 얻는 의 싱클레어를 연상하게 한다.
크레이그는 학교에서 가난뱅이라고 놀림 받고 '여자 따먹기엔 성경 캠프가 최고'라는 또래에게 성경 캠프에서도 따돌림 당하는 캐릭터다. 성경에 대한 회의는 갈수록 커지지만 '하나님은 무슨 이유에선가 내게 실망하신 듯' 하다고만 할 뿐, 그래도 성경을 읽었고 그 때문에 더욱 왕따 당한다. 하지만 성경 캠프의 열광적인 집단 찬양 역시 그에겐 낯설다.
그런 그에게 구원 같은 존재가 성경 캠프에서 만난 레이나였다. '건축학개론'의 서연처럼, 레이나는 크레이그의 일상에 구원이었고 서서히 차오르는 그의 욕망을 아름답게 충족시켜줄 대상이었다. 애틋한 사랑을 한 차례 겪은 뒤 그는 집을 떠나 독립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 즈음부터 교회에 다니기 그만 둔 이유를 동생 필에게 이렇게 설명한다.'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도 믿고 있지만, 나머지는 다 내 마음을 떠났어. 성경, 교회, 교리…. 사람과 문화를 접하는데 장벽이 될 뿐인 것들. 인간의 아름다움을 부정하잖아. 개인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채워 넣어야 할 공백들도 인정하지 않고.'
어린 시절 종교적인 집안 분위기에 짓눌리고 왕따에 상처 받으며 '내 기억을 전부 불사르고 싶었다'던 주인공은 이야기 마지막에서 하얀 눈길을 혼자 걸으며 '새하얀 표면에 흔적을 남긴다는 건 얼마나 뿌듯한 일인지'라고 되뇌인다. 레이나와의 추억은 물론 힘들었던 기억까지 끌어안을 만큼 그도 성장한 것이다.
만화는 진지하지만 군데군데 재미도 넘친다. 특히 어릴 적 동생과 한 침대를 쓰며 장난치고 싸우던 장면은 절로 웃음 짓게 만든다. 그림의 수준이나 익살의 수위가 한 수 위인 인기 만화 '캘빈&홉스'가 생각난다.
2004년 출간과 함께 미국의 권위 있는 만화상을 휩쓴 이력이 말해 주듯 는 '오락'말고도 만화가 얼마나 문학적인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만약 당신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책 한 권을 생각하고 있다면, 전편에 걸쳐 눈이 등장하고 교회와 성경 이야기가 나오는 이 책은 좋은 선택이다. 흔히 아는 '만화'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500쪽이 넘는 두께에 양장 제본이 전혀 아깝지 않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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