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심폐연구소의 한 화학자가 1970년대 초에 100명의 표본에서 추출한 혈액에서 플라스틱 가소제인 DEHP, 프탈레이트의 잔여물 등이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그때까지 공장 노동자들의 플라스틱 피해가 문제가 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자동차, 장난감, 벽지, 전기 배선, 컵 등 일상에서 플라스틱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성분이 검출된 것은 처음이었다. 한 미국 언론은 이 연구 결과를 전하며 '이제 인간도 조금은 플라스틱'이라고 표현했다.
물론 인간이 플라스틱이 될 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플라스틱 없는 인간의 삶이 불가능해졌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플라스틱의 본격적인 보급이 2차 세계대전 이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새삼 놀랄 일이다.
는 플라스틱이 현대인의 삶에 얼마나 깊숙이 자리잡았고, 어느 정도나 필수불가결한 물건인지를 다양하게 조명한 책이다. 미국의 과학 전문기자인 저자는 플라스틱의 대량생산이 우리 삶을 얼마나 윤택하고 풍요롭게 만들었는지 이야기한다. 19세기 후반까지도 빗은 부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코끼리의 상아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빈부의 격차를 해소하는데 플라스틱은 큰 몫을 했다. 원하는 모양을 마음대로 만들 수 있다는 플라스틱의 장점은 생활용품을 매력적인 예술품으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하지만 플라스틱이 가져온 피해도 적지 않다. 플라스틱 제조ㆍ이용 과정에서 그 성분에 오염돼 건강을 위협받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일회용품의 범람으로 함부로 쓰고 버리는 소비 습관이 널리 퍼졌고, 비닐봉지 등 플라스틱 쓰레기 때문에 멸종 위기에 내몰리는 동물도 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썩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대로라면 지구는 플라스틱에 뒤덮인 쓰레기장이 될 지도 모른다.
방대한 인터뷰와 자료를 인용해 가며 플라스틱 이야기를 엮어낸 저자는 책 말미에서 "플라스틱이 처음에 했던 약속에서 너무 멀리 와 버렸다"고 지적한다. 자연의 한계에서 해방시켜 주고, 부를 민주화하며, 예술에 영감을 주고, 우리 스스로를 원하는 대로 바꾸어 낼 수 있다는 약속 말이다. 그 잘못이 플라스틱 자체에 있는 건 물론 아니다. 플라스틱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은 바로 그 "물질을 활용하는 우리의 창조력, 상상력, 공동체를 만드는 능력, 위험을 인식하는 능력, 더 나은 길을 찾을 수 있는 능력"에 달린 것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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