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십년 쯤 전 이야기다. 내가 책방을 차리기 전, 책하고 전혀 상관없는 컴퓨터 회사에 다닐 때였다. 퇴근 하고 저녁시간 TV에서 우연히 어떤 할머니가 침팬지와 함께 노는 모습을 보았다. 그 할머니가 누구인지, 무엇하는 사람인지 그때는 전혀 몰랐다. 세상엔 별 사람이 다 있구나, 하면서 그냥 지나쳤을 뿐이다.
그 사람이 제인 구달이라는 걸 안 것은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해서 일을 하기 전 동료들과 간단히 차를 마실 때였다. 처음은 어제 TV 프로그램 얘기를 하다가 나온 누군가의 농담으로 시작됐다. "제인 구달 박사 나오는 방송 보셨어요? 그 분 이름이, 모든 게 다 좋다, 라는 의미에서 '굿-올'그러니까 붙여서 '구달(Goodall)'이에요. 정말 좋은 이름이잖아요!" 우스운 말장난 인줄 알고 넘기려 했는데 문득 호기심이 발동해서 자리로 돌아간 뒤 인터넷으로 검색 해보니 이름 중에 쓰인 '구달'이 정말로 'Goodall'이었다. 게다가 그 이름이 가명이 아니라 본명이라니! 하긴 학자가 연예인도 아닌데 가명을 쓸 리가 있나. 어쨌든 나와 제인 구달의 인연은 그렇게 조금 엉뚱하게 시작되었다.
그날 저녁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금 천천히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봤다. 당시 내가 알아낸 정보는 아주 단편적인 것들뿐이었는데, 그래서 주말동안 시내 서점 몇 군데에 들러 제인 구달 박사가 쓴 책을 찾아서 읽어보기로 했다. 책은 많지 않았다. 내가 찾아낸 책들에는 '침팬지와 함께 한 나의 인생', '제인 구달의 침팬지 이야기'라는 부제목이 붙어있든지, 아니면 아예 책 표지에 침팬지 사진이 크게 실려 있었다. 책을 대강 훑어 본 바로는, 박사는 몇 십 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침팬지를 연구했고 그래서인지 지금은 환경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매일매일 회사와 집을 오가며 똑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는 나에게 침팬지와 환경은 아무런 연결 고리도 없는 것 같았고, 아프리카는 그저 지구본에서나 봤던 커다란 양말모양 땅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십여 년 시간이 지났다. 내겐 큰 변화가 있었다. 컴퓨터 회사를 그만두고 책방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직장 생활 할 때보다 일하는 건 느슨해졌지만 돈벌이가 시원치 않아서 달마다 조마조마한 통장잔고 줄타기를 한다. 며칠 전 어느 단체에서 주최한 환경 관련 행사에 구달 박사의 대중 강연회가 있다고 하기에 오래 전 그때 일이 떠올라 곧장 인터넷으로 참가신청을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회사를 다닐 때 구달의 책을 몇 권 읽고 느낀 것이 별로 없었다. 침팬지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서 한 차원 더 넘어, 소통하며 함께 생활한 것을 읽고 감탄한 기억이 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당시에 소통이라는 것에 대해 내 견해는 좀 달랐다. 회사생활을 통해 익숙해진 소통의 기술은, 내 뜻을 다른 사람에게 관철시키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어떻게 하면 내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지 못하면 결국 내가 그쪽 편이 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지금 내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구달은 그게 무엇인지 알았고 책을 통해 계속 그것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때 나는 미처 그것을 듣지 못했다. 오로지 내가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강연시간 내내 구달은 인간이 자연과 소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소통이 끊어지면 자연과 인간의 관계도 끊어진다. 오랜 시간동안 사람들은 자연을 잘 이용해서 인간에게 이로움을 주도록 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것은 사람이 중심이 된 소통이다. 하지만 지금껏 그렇게 소통하면서 우리는 얼마나 자연을 괴롭히고 망쳐 놓았던가.
소통이란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존중하며 주고받는 것이 아닐까? 회사생활을 하면서 내가 그토록 스트레스를 받은 것 또한 오로지 내가 중심이 된 소통을 밀고나갔기 때문이다. 책방에서 일하며 힘든 일도 많지만 좋은 점이 있다면 사람들과 소통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조금씩 배우고 있다는 것이다.
소통은 끊임없이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겸손한 과정이다. 책에게, 사람에게, 자연에게 겸손한 마음으로 다가가면 그로부터 배움이 시작되고 그것이 곧 소통이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
윤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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