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지붕 위에 보이는 조그만 조각들은 뭘까요?"
19일 낮 서울 경복궁 근정전 앞. 안내자가 근정전 추녀마루를 가리키며 질문을 던지자 한 무리의 외국 청소년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곧바로 한 히스패닉계 여학생이 번쩍 손을 들더니 용두(龍頭)와 장식기와인 잡상(雜像)을 가리키며 "악귀를 쫓아낸다는 뜻을 담아 동물상 등으로 만든 것"이라고 답했다. 이들은 한국인도 잘 알지 못하는 문화재의 의미를 잘 풀어냈다. 낯선 광경은 이뿐이 아니었다. 교사가 포상으로 과자를 건네자 이 여학생은 '땡큐'라는 말 대신 두 손을 공손히 모아 허리를 굽히는 '배꼽인사'를 했다. 다른 학생들 역시 너무나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이며 인솔자에게 인사했다.
경복궁 경내에서 '깜짝쇼'를 연출한 이들은 한국식 교육으로 미국 뉴욕의 최상위권 학교로 탈바꿈한 데모크라시 프렙 차터 스쿨(Democracy Prep Public Charter Schoolㆍ프렙 스쿨)의 10~12학년(한국의 고교과정) 학생들과 교사들이다. 이들이 한국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20일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도 이들은 배꼽 인사를 하며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고 깍듯하게 인사해 교육부 관계자들의 환대를 받았다.
프렙 스쿨은 2001년 천안 동성중에서 영어 원어민 교사로 일했던 교장 세스 앤드류(35)씨가 2006년 세운 공립학교 연합체. 앤드류씨는 높은 학구열과 학생들의 열정이 한국을 짧은 시간에 선진국으로 올려 놓은 비결이라 믿고 예절 등 한국식 교육방식을 미국의 대표적 빈민 지역인 뉴욕 할렘에 적용했다. 프렙 스쿨 학생들은 이른 오후에 수업이 끝나는 일반적인 미국 학교와 달리 오후 5시까지 학교에서 공부를 한다. 덕분에 학생 대부분이 저소득층 흑인, 중남미 이민 가정 출신임에도 4년 만에 90%가 뉴욕주 고교 학업 성취도 시험(Regents Exams)을 통과했고, 인근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의 사립 학교보다도 좋은 성적을 거두는 기적을 이뤄냈다. 미국 연방 정부는 최근 프렙 스쿨에 대해 예산을 더 지원하기로 했고, 학교 측은 현재 할렘과 인근 뉴저지 주에 7개가 있는 학교 수를 22곳까지 늘리기로 했다. 이들은 학교에서 필수 과목으로 한국어를 배우고, 사물놀이나 봉산탈춤 등 한국 문화와 역사도 선택 과목으로 공부하고 있다. 이 학교 한국어 교사인 이정진씨는 "지각 등 잘못을 하는 경우 학생들이 반성문을 쓰거나 반성하는 시간을 갖는 등 엄격한 훈육시스템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9일 12박 13일 일정으로 한국에 온 프렙 스쿨 학생 37명은 한국 학교와 경주 등 역사 유적지 등을 둘러보고, 홈스테이로 한국의 정을 느꼈다. 영화 '광해'를 보면서 한국 대중 문화도 체험했다. 특히 한국에서의 마지막 날인 20일 밤에는 한류 문화의 상징인 '대장금' 이영애씨와 식사를 함께 하는 뜻 깊은 시간도 가졌다.
이들은 한국에서의 일정 동안 포크 대신 젓가락을 쓰고, 햄버거 대신 비빔밥 부대찌게 두부전골 등 한국 음식을 먹는 등 철저히 한국식 생활을 했다. 한국 교류프로그램 담당자 이승희(26)씨는 "첫 날 국과 반찬도 구분 못하고, 젓가락질도 서툴러 음식을 흘리던 학생들이 며칠 새 젓가락질에 익숙해질 만큼 한국 문화에 대한 적응 속도가 빨랐다"며 "평소 한국 문화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공부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애슐리 로드리게스(18)군은 앤드류 교장이 근무했던 천안 동성중 재학생 집에서 맛본 김밥을 잊지 못했다. 홈스테이를 하며 직접 김밥을 만든 그는 "김밥을 둘둘 말다 터지기도 했지만 정말 재미 있었고, 맛도 대단했다"며 엄지를 내보였다.
앤드류 교장은 "학생들에게 동영상이나 교과서를 통해서만 접했던 한국 사람과 한국 문화를 직접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며 "미국에 돌아가 틀림없이 많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한국 자랑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프렙 스쿨 학생들은 21일 미국으로 출국한다.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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