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 한 자와 고문 당한 자가 함께 자리를 했다. 고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의 고문 실화를 영화화한 '남영동 1985'의 두 주연배우 이경영, 박원상을 지난 14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났다. 실제라면 용서를 구했어야 할 자리, 하지만 그들은 친형제보다 다정한 우애를 자랑했다.
-오래 연기를 해왔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고문은 너무나 특별한 경험 아닌가.
이경영(이하 이)=끊임없는 고문이 반복됐어요. 고문 연기 자체를 즐기지 못하면 견디질 못했어요. 집단 최면에 걸린 것 같은 상황이었죠. 카메라 뒤에까지 긴장감과 집중력을 가져가면 누군가는 쓰러졌을 거에요. 쉬는 시간만 되면 일부러라도 농담을 나누며 분위기를 바꾸었어요.
박원상(이하 박)=촬영 초반엔 캐릭터에 집중하기 위해 일부러 혼자 있으려 했어요. 이어폰 꽂고 음악 듣고 있을 때 다른 선배들이 농담 나누고 간식 먹는 모습을 보면 미웠어요. 하지만 결국 저도 나중엔 그 분위기를 받아들였어요. 안 그랬으면 완주 못했을 거에요.
-아무리 연기라 해도 고문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을 거 같다.
박=연출부가 물고문 전에 거즈에 랩을 씌우는 등 방법을 찾았지만 실제엔 아무 도움 안됐어요. 결국 내가 버텨내야 했어요. 마지막 고문신인 고춧가루 물고문은 매우 긴 롱테이크가 필요했는데 그게 가능해지더라고요. 그만큼 익숙해진 거죠.
이=원상이는 점차 고문에 익숙해져 견뎌내는 힘이 생겨났지만 저흰 반대였죠. 고문의 강도가 세질수록 진짜 힘들었어요. 영화를 위해선 사실에 가까운 고문을 해야 하는데, 자칫 잘못하면 원상이가 사고 날 수 있어요. 아주 많은 고민을 안고 카메라 앞에 서면서도 티를 내면 안돼요. 고문이 반복되면서 저희가 오히려 피해자가 돼요. 원상이 비위도 맞춰야 했어요. '나 가려워' 하면 긁어줘야 하고요.
박=칠성판에 묶이면 심리적으로도 위축돼 그런지 얼굴 여기저기 가려운 곳이 생겨요. 그걸 말을 안 해도 귀신같이 긁어준 분이 이경영 선배에요. 선배가 '베를린' 촬영차 잠시 독일 다녀오는 동안 미치겠더라고요. 다른 사람들은 자꾸 애먼 데만 긁어줬거든요. 제 배위에 올라타 물고문을 하는 장면이 있어요. 이경영 선배나 명계남 선배 모두 체중을 싣지 않으려 어정쩡하게 다리 힘으로 버티더라고요. 다리가 떨리고 근육 경련이 왔을 텐데도요.
이=그런 고통이라도 좀 적게 해줘야죠. 계남이 형이나 저나 속살이 많아 무거워요.
-'용서'란 무엇인가.
박=용서는 잘못을 한 사람이 먼저 찾아와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구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요. 용서를 구하는 게 먼저고 용서해주는 것은 그 다음의 또 다른 선택인 거죠. 개인이든 국가권력이든 잘못했던 쪽에서 한번이라도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던 적이 있었나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진심이 있어야 해요.
-이 영화는 보는 게 괴로울 거라는 평이 많다.
이=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영화를 통해 내가 왜 힘들었는지 알게 되면 가슴의 먹먹함을 털어내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겁니다. 감화나 감동은 영화가 주는 선물 중 하나에요. 그것이 고통 속에서 나온 것이라면 더더욱 크게 다가올 겁니다.
박=그냥 주저하지 말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영화가 개봉되면 아내는 동네 아주머니들 이끌고 보러 오겠대요. 홀딱 벗은 내 몸이 나오니 각오하라고 했죠.
10년 전 성매매로 유죄 판결을 받고 오랫동안 영화계를 떠나 있었던 이경영은 이 영화를 계기로 세상에 본격적으로 얼굴을 드러냈다. 영화에는 수년 전부터 출연해왔지만 그동안 적극적으로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는 '남영동' 시사회를 본 주변 반응이 뜨거웠다고 말했다. "권해효가 영화를 보고 나와선 저를 세게 끌어안았어요. 그리곤 '형 원대복귀 축하해' 하더라고요. 그렇게 진심으로 저를 기다려준 영화인들 곁으로 돌아온 것이 정말 고마웠어요. 이제 다시는 영화인으로서 영화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요."
인터뷰 내내 과거에 대해선 말을 아끼려 했던 그는 이혼한 부인을 두고 "사랑했던 여인을 참 아프게 보냈다"며 "제가 더 잘 살아간다면 열 다섯 살인 아들을 더 빨리 볼 수 있는 시간을 만들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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