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형세는 백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백이 실리도 충분하고 두터움 면에서도 앞서 있어서 흑이 정상적으로 둬서는 도저히 역전을 기대하기 힘든 국면이다. 흑에게 남은 희망은 오직 하나. 오른쪽의 거대한 백 대마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서 몽땅 잡아버리거나 최대한 이득을 챙기는 길뿐이다.
한데 김동호는 아직도 천하태평, 전혀 서두르는 기색이 없다. 당시 한국기원 기자실에서 함께 바둑TV 생중계를 지켜보던 명인전 전속 해설자 윤현석 9단은 흑1을 보자 "김동호가 침착해도 너무 침착하네요. 이건 마치 자기가 이겼다는 뜻인데요"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지금은 흑이 이렇게 느긋하게 둘 때가 아니다. 하다못해 1로 들여다 본 다음 3으로 한 칸 뛰든가 해서 계속 상대를 괴롭히면서 실리를 벌어들였어야 했다. 실전에서는 2, 4로 둬서 대마가 너무 간단히 살아 버려서 백은 아무 근심 걱정이 없어졌다. 슬슬 안전하게 마무리만 하면 승리가 눈에 보인다.
김동호가 이제야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듯 21로 끊어서 뭔가 시빗거리를 만들려고 했지만 너무 때가 늦었다. 이 부근은 워낙 백이 강한 곳이어서 얼핏 보기에도 별 수가 날 것 같지 않다.
박영철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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