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심 대상작은 단편 세 편, 장편 네 편이었다. 이 중에 비교적 길게 논의된 작품은 다음과 같다.
조현의 단편'그 순간 너와 나는'. 시골 출신의 사십대 남성이 화자로 나와 1980년대 왕십리에서 보낸 성장기를 이야기한다. 대중서사장르의 장치들을 혼합하는 작법으로 주목을 받은 저자의 작품치곤 이례적인, 사실주의 양식의 추억담이다. 철로가 관통하고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왕십리의 주변부적 상황에 대한 묘사, 굴욕과 선망, 우정과 배신의 교차로 속으로 발을 들여놓은 십대들의 경험에 관한 서술 중에 재미있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추억된 과거 속의 사건이 빈곤한 편이고 그런 만큼 화자가 토로하는 감회가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진다.
이장욱의 단편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 이 제목의 출처인 얀 반 에이크의 유명한 그림에서 촉발된 일련의 연상을 현대 한국사회의 풍속으로 육화시킨 작품이다. 아르놀피니는 영안실 관리인으로 추정되는 노인으로, 그의 신부는 가사도우미와 나이트클럽 알바를 겸하고 있는 삼십대 이혼녀로, 그림 속의 거울에 모습을 비친 화가 반 에이크는 작가로 치환되어 있다. 이혼녀가 작가를 상대로 펼치는 자아도취적 어조의 수다를 내용으로 하는 이 단편은 포스트모던 문화의 특징, 즉 문화 텍스트들의 탈콘텍스트화된 소비라는 특징을 그 형식에 용해시켜 보여준다. 문화의 자기반성을 수행하는 소설의 범례가 되기에 족한 작품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본심에서 경합한 장편들보다 우수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한강의 장편 '희랍어시간'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언어를 되찾고자 하는 여자 각각의 내면적 삶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빛과 어둠, 언어와 침묵, 삶과 죽음 사이에 처한 인간의 고뇌를 탐구한다. 환(幻)을 본질로 하는 존재에 대한 남자의 절망, 침묵의 자궁을 빠져나온 태초의 언어에 대한 여자의 동경은 한국소설에 흔치 않은 형이상학적 근심의 표현이다. 아쉬운 것은 그 근심의 주제가 남자와 여자 이야기 속에서 박력 있게 전개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권여선의 장편 '레가토'는 박정희정권 말기 학생운동서클멤버였던 남녀의 이야기를 그로부터 약 삼십 년이 지난 현재 그들의 이야기와 겹쳐서 들려준다. 학생운동에 어떤 신화도 허여하지 않는 저자ㆍ서술자는 거기에서 관념과 연극, 치기와 폭력을 보며 운동세대가 짊어진 참회의 책임을 상기시킨다. 소설 기술의 여러 방면에서 성공적인 작품이다. 특히 폭력의 시대가 낳은 인간 참상의 예인 정연과 그녀의 어머니들의 잔상은 책장을 덮은 다음에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항쟁세대의 고해성사이라고 부를 만한 권여선 소설의 절정이자 한국문학에서 기억의 윤리학이 성숙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판단된다. 수상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김윤식 성석제 황종연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