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회 한국일보문학상 본심후보 인터뷰 끝 무렵에 권여선씨는 "수상자에게 미리 축하인사 드린다"고 말했다. 수상작 '레가토'는 지난 5월 출판된 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해 작가 스스로 "아픈 손가락"에 비유했던 작품. 때문에 수상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지난 9일 만난 권씨는 "애쓴 작품으로 한국일보문학상 후보에 처음 오른 것만으로도 기뻤는데, 수상까지 하게 되다니 그저 놀랍고 어리둥절할 따름"이라며 "이보다 훌륭한 치유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희정권 말기 학생운동서클 '카타콤'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학생운동의 치기와 폭력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화자를 통해 386세대의 어제와 오늘을 반추한다. 예심 심사위원들이 2012년 문학계 특징으로 꼽은 '1970~80년대를 재해석한 작품'이란 점에서 최근 한국소설의 경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수작이다. 이승우의 장편'지상의 노래', 김정환의 장편 'ㄱ 자 수놓는 이야기', 조현의 단편 '그 순간 너와 나는' 등 1970~80년대를 오늘의 관점으로 재해석한 소설이 올 한해 다수 발표돼 평단과 출판계의 눈길을 끌었다.
- 1996년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로 등단한 이후 줄곧 단편소설만 써왔다. 사실상 첫 장편소설에 가까운데 장편 발표가 늦어진 이유는 뭔가?
"등단 후 단편 몇 편을 쓰고 8년 동안 잊혀진 작가로 지냈다. 아무 글도 발표하지 못했고 출판사 윤문이나 번역으로 생활했다. 우연한 기회에 2003년 첫 소설집을 내고 나서 소설 청탁이 들어왔다. 등단 16년 차이지만 작가생활은 절반 정도만 한 셈이다. 소설집 3권, 장편 1권을 냈으니 이력으로는 '김애란 급'이다.(웃음)"
- '레가토'가 저평가된 결정적 이유는 후일담소설 형식 때문이다. 출판계에서 70~80년대 운동권 이야기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다는 편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럼에도 이 소재를 택한 이유가 무엇인가?
"79~80년을 소설 배경으로 한 이유는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루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80년대 초중반 학번을 지배한 정서가 광주였고, 나도 그 영향권에 있었다. 작가가 되기 전부터 언젠가 꼭 광주에 대해서 쓰고 싶다고 생각해왔다. 내가 대학 83학번인데, 광주민주화운동을 전후로 대학가 분위기가 상당히 달라졌다. 이 소설을 쓰면서 70년대 말 운동권 분위기를 알기 위해 취재를 다시 했다."
- 올 한해 한국문학 특징 중 하나가 70~80년대를 재해석한 소설이 다수 발표됐다는 사실이다. '레가토'를 출간할 즈음 이런 흐름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소설뿐만 아니라 영화 '26년', '남영동 1985'처럼 문화계 일반적으로 비슷한 흐름이 있는 것 같다. 'MB정부가 창작자들에게 이렇게 영감을 주는구나'(웃음)하는 생각을 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이 정부를 겪으며, 창작자들이 그 시대에 대한 향수를 갖는 것 같다. 한편으로 용산사태 등 현재 문제를 쓰면 젊은 감각으로 호응받지만, 후일담 피로감이 문학에 만연하기 때문에 70~80년대 이야기는 어느 정도 핸디캡을 안고 간다. 과거 사건을 새롭게 볼 수 있도록 써도, 그렇게 읽어주지 않는다."
- 이 소설이 장편서사의 골격을 잘 갖추었지만, 한편으로 진부하다는 평이 있다.
"절박하게 사연을 숨기거나 반전을 시도하지 않고 정공법으로 쓰려고 했다. 패를 다 보여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2장만 읽어봐도 오하연이 오정연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장편소설은 독자와 같이 호흡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대중적으로 쓰려고 했다. 문장, 글, 대화를 통해서 캐릭터에 애정을 갖고 읽어줬으면 한다."
- 79학번인 오정연, 80년 생인 오하연이 등장하는 부분은 화자의 말하기 방법이 상당히 다르다. 오정연의 등장 부분에서는 80년대 리얼리즘 소설, 오하연의 등장 부분에서는 최근의 단편소설을 읽는 느낌이다.
"소설을 쓸 때 현재와 과거가 다른 문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유도 용어도 말투도 다 다르게 하려고 노력했다. 과거의 챕터만 묶어놓으면 7,80년대 소설로 읽히고, 현재만 묶어놓으면 2000년대 소설로 읽힐 수 있을 정도로. 소설 속 오정연은 전라도 출신인데, 내 고향이 경상남도라 사투리 공부를 따로 했다. 외국어 공부하듯 어미변화 등을 입으로 계속 생각하면서 원고에 방점도 찍었었다."
- 최근 발표되는 소설의 상당수가 주인공과 화자의 입을 빌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가르치듯 하는 것인데, 장편에서 이런 부분이 한 문장도 없었다. 아주 정통적인 방법으로 인물, 사건을 서술하는데, 1,600매 가량을 연재 한 후 단행본으로 출간하며 400매를 덜어냈다고 들었다. 퇴고에 원칙이 있나?
"피흘려 쓴 문장이기에 줄일 때 쉽지 않지만, 퇴고할 분량을 정해두고 무조건 줄인다. 스티븐 킹이'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는 최상의 원고에서 10%를 걷어 낸다고 하는데, 나는 15%를 목표로 잡았다. 집필 초반에는 의욕이 과하기 때문에 묘사가 많이 들어간다. 퇴고할 때는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줄였다."
- 끝으로 소감은
"이 소설은 좀 어렵고 힘들게 썼다. 쓰고 나서도 혼란스럽고 힘 들었다. 그래도 이 소설을 안 썼더라면 제가 지금 어떻게 되어 있을지 모르겠다. 제법 안간힘을 쓰고 나니까 이제 내부에 묵직한 항아리처럼 힘이 고일 자리가 있다는 걸 안다. 그 자리에 힘이 잘 고이게 만들어서 또 써야겠다는 야심도 생긴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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