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려보고 싶은 식당이 있다. 메뉴도 다 생각해 놨다. 김과 하얀 밥과 맑은 간장. 김과 하얀 밥과 명란. 김과 하얀 밥과 조개젓. 김과 하얀 밥과 무장아찌. 김과 하얀 밥과 절인 올리브. 김치나 단무지를 곁들이지 않고 오직 김과 하얀 밥과 작은 찬 하나만을 놓은 간소한 식탁.
물론 번화가에는 곳곳에 오니기리집이 있다. 가끔 들러 두 개쯤 주문해 먹기는 하지만, 뭉쳐진 주먹밥을 젓가락으로 헤쳐먹어야 한다는 게 영 마뜩찮다. 밥 때문에 김은 눅눅해지고, 눅눅해진 김 때문에 밥과 속재료는 엉망으로 엉겨 흐트러진다. 게다가 일본 김은 두껍고 달착지근하다. 한식집에서는 종종 구운 김과 심심한 양념간장을 상에 놓아주지만, 그걸 맘껏 즐기기엔 안타깝게도 먹어야 할 요리들이 너무 많다.
가을이 오고 공기가 건조해지기 시작하면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청명한 날씨 때문이 아니라, 김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눅눅한 계절이 지났으니 이제는 집에서 김을 굽고 6등분으로 잘라 밀폐용기에 쟁여놓을 수 있다. 1회용 도시락김을 뜯지 않고도 끼니때마다 김을 먹을 수 있다.
이렇게 얇고 바삭한 김을 먹을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나는 김의 맛을 모르는 삶을 살았겠지. 김의 맛을 모르는 삶이라니. 아무래도 그건 나의 삶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신해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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