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하게 쇄국을 고집했던 조선이 1882년 구미 열강 중 최초로 미국과 수교를 결정했을 때 조선에는 영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때문에 중국인을 중간에 넣은 3중 통역으로 미국과 수교 협상을 맺어야 했다. 그로부터 불과 몇 년 후 조선에는 영어 열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8일 밤 10시 KBS 1TV가 방송하는 '역사스페셜'은 19세기 후반 조선사회가 영어를 만나면서 빚어낸 다양하고 흥미로운 세태를 그린다.
1885년 조선에는 최초의 관립 영어 학교인 육영공원이 설립됐다. 이어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배제학당, 이화학당 등 사립 학교들도 속속 들어섰다. 이를 기점으로 조선에는 영어 열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고종 황제는 육영공원에서 친히 영어 시험을 감독했으며 황태자에게는 영어 개인 과외를 시키기도 했다.
조선인들의 영어 학습 능력은 외국인 선교사들을 놀라게 했다. 영국인 새비지 랜도어는 저서 에 "두 달 전 f와 p 발음을 구분하지 못하던 19세의 이 조선 젊은이는 영어의 해석과 회화에 완벽했다. 그는 하루 200 단어를 외우는 속도로 영어사전을 정복해 나갔다"고 썼다. 놀라운 학습 능력의 비결은 원어민과의 대화 중심 교육 방식에 있었다.
하지만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이 같은 영어 학습 능력은 망가졌다. 한일 병합 이후 일제는 원어민 대신 발음이 엉터리인 일본인들이 영어를 가르치게 했고, 학습 방식도 말하기 위주에서 문법과 독해를 강조하는 일본식으로 변질시켰다. 때문에 발음이 나쁜 일본인 영어 교사들을 조선 교사들로 바꿔달라고 요구하는 학생들의 동맹 휴업 사태가 속출하기도 했다.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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