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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11월 3일] 예술혼의 두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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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11월 3일] 예술혼의 두 경우

입력
2012.11.02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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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만든 악기 가운데 가장 장엄하고 위력 있는 것은 파이프 오르간으로 알려져 있다. 그 초기 발명은 고대 그리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중세 유럽에서도 소규모의 이동 가능한 형태로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오늘날과 같은 규모와 음향효과는 1,800년대 들어 맥주 캔 아이디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숨어 있다.

미국의 젊은 피아니스트 론 세버린(Ron Severin)이 주류상회 앞을 지나다가, 그 앞에 산적해 있는 빈 맥주 캔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빈 캔들이 줄지어 쌓여 있는 것을 보는 순간,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음악적 영감이 섬광처럼 그의 영혼을 흔들었던 것이다. 그는 곧 주인을 만나 이 캔들을 자기가 치워주겠다고 제안했다. 주인은 감사하다고 하며 그렇게 하라고 했다. 당시 세버린은 캘리포니아 롱비치주립대 학생으로서 다우니교회의 오르가니스트였다.

세버린은 한 아름씩 캔을 실어 와서 손질하기 시작했다. 위와 아래의 뚜껑을 모두 따내고 깨끗하게 소독을 한 다음 긴 파이프가 되도록 납땜을 했다. 어떤 것은 길게, 어떤 것은 짧게 만들고 파이프의 주둥이 부분을 만들어 달았다.

각기 파이프의 길이를 달리하여 플루트와 비올라의 소리가 나게 하는 데는 한 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으나, 리이드와 유사한 음을 내는 데는 오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결국 그는 3년의 세월을 투여하고서 아름다운 파이프 오르간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인류 역사에 새롭고 웅장한 악기 하나가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더욱이 그는 인간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술이 담겼던 그릇을, 고상한 예술의 도구로 만들었다. 같은 물질이라도 쓰기에 따라 이렇게 그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어서, 같은 물을 뱀이 먹으면 독이 되지만 양이 먹으면 젖이 되는 이치와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자칫 간과하고 넘어가기 쉬는 사실은, 3년의 짧지 않은 시간을 파이프 오르간 제작에만 바친 한 젊은 음악가의 예술혼이다.

이 집중과 몰두의 침잠이 없이는 예술적 생산을 기대할 수 없는 까닭에, 예술가는 때로 자신의 생명과 맞바꾸면서도 이 험난한 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위대한 예술 작품을 남긴 이들의 삶에는, 이처럼 외롭고 힘든 뒤안길의 발걸음이 아로새겨져 있다. 베토벤의 선율에서, 고흐의 화폭에서, 두보의 방랑시편에서, 이상의 초현실적 문면에서 그 여러 증좌가 목격된다.

젊은 나이에 모국을 떠나 일생을 미국에 머물면서, 지속적으로 작품을 쓰고 또 후배 문인들을 문학의 길로 인도한 작가가 있다. 샌프란시스코 한국문학인협회를 조직하고 해마다 지역 문인들과 창작집을 발간하며 여름이면 문학캠프를 열어 문학의 이름으로 모국어를 지킨 재미 작가 신예선 선생의 이야기다. 세버린이 파이프 오르간에 쏟아 부었던 열정처럼 그의 뜨거운 문학열이야말로, 지금까지 그를 지켜온 힘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 신 선생이 올해 경남 하동에서 열리는 이병주국제문학제의 국제문학상 대상을 받았다. 한국 문단의 원로와 중진 작가 및 평론가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은, 한결같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거기에 온 인생을 던진 단호한 선택에 관해 언급했다. 나라나 직분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순국과 순직이 있듯이 그에게 문학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는 순문학(殉文學)의 과단성이 있었기에 작가로서 존중 받는 자리에 이르렀을 터이다. 한 차례의 수상으로 한 작가의 문학 인생을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세상은 그 나름으로 냉엄한 기억의 회로를 그렇게 작동하고 있었다.

겉으로 별다른 인과의 친연성이 없어 보이는 사실들마다, 마침내 벗어날 수 없는 보응의 원리 아래 복속되어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그래서 "하늘 그물은 성기지만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는다"고 노자는 말했다. 우리도 자기 몫을 뜨겁게 감당한 예술가들 처럼 눈앞의 일에 성실을 다한 다음에야 그 세월이 가져다줄 보상의 결과를 기대하며 기다려 볼 수 있겠다.

김종회 경희대 국문과 교수ㆍ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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