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었다. 결실과 수확의 계절이다. 시장에 나가보면 햇곡식과 과일이 풍성하다. 각 지방의 특산물 광고도 요란하다. 얼핏 넉넉해 보이는 풍경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전세계 식량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에그플레이션이 이미 코 앞에 닥쳤다. 특히 미국을 위시한 식량수출국들의 올 여름 농사가 아주 나빴다. 올해 말, 내년 초가 되면 먹거리 가격이 걷잡을 수 없이 뛸 가능성이 있다. 우리의 식량자급률은 20% 조금 위에서 턱걸이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자급하고 있다던 쌀도 작년 현재 83% 수준으로 떨어졌다. 직불제 액수가 제자리를 맴돌면서 쌀농사를 포기하는 농가가 많아졌다.
아마 세상에서 우리만큼 식량자급률이 낮으면서 우리만큼 천하태평인 나라도 없을 것이다. "필요하면 돈 주고 사오면 된다"는 배금사상이 뼛속 깊이 박혀있기 때문이다. 해외농업을 개발해서 식량을 확보한다는 발상도 마찬가지다. 실효성도 떨어지고, 위기상황이 왔을 때 해외로부터 식량을 추수해서 고스란히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 자체가 황당한 발상이다. 해외에 농지를 구입하는 나라에게 토지수탈이라는 비난이 빗발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크게 보아 이 모든 문제는 이른바 '식량 레짐', 즉 먹거리의 생산과 분배를 기업, 시장, 무역의 회로 속에 내장시켜 놓은 탓에 발생했다. 먹거리를 일반 상품과 동일한 논리로 다루는 한 식량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있다는 진리를 깨쳐야 한다. 일단 식량자급률을 높여야 한다. 또한 농생태적으로 먹거리를 생산하는 것이 기후변화 시대에 인간과 자연이 함께 살 수 있는 제일 좋은 방식임을 인정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많은 이들이 이야기해 왔다. 그런데 먹거리 문제를 논하기 전에 먹거리를 만드는 사람, 농민의 현실을 생각해야 한다. 전세계에서 농촌인구 비율이 줄었지만 절대숫자로 아직도 인류의 3분의 1이 농민이다. 그런데 농민 특히 소농들의 삶은 참으로 신산하다. 오늘날 기아와 만성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인류가 약 10억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이 중 7할이 소농과 농촌거주 영세민이다. 먹거리 생산자들이 가장 헐벗고 가장 굶주리는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현실을 세계 인권운동이 놓칠 리 없다. 지난 9월 말 유엔인권이사회에서 중요한 결의안이 통과됐다. 농민과 농촌지역 노동자들의 권리에 관한 유엔선언을 제정하기 위한 실무그룹을 구성하기로 한 것이다. 2014년 가을까지 초안을 작성해서 보고하게 되었으니 빠르면 2년 뒤 역사상 최초로 유엔에서 농민인권선언이 나오게 된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이 발표된 후 인권의 발전은 크게 보아 두 가지 경로를 거쳤다. 하나는 주제별로 인권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인종차별철폐 혹은 고문금지와 같은 주제가 대표적이다. 다른 하나는 해당 집단별로 인권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1979), 어린이-청소년(1989), 이주노동자(1990), 장애인(2006), 원주민(2007) 등이 국제인권 규범의 대상이 됐다. 공식적인 조약도 있고, 덜 공식적인 선언도 있었지만 어쨌든 세계가 인정한 인권보호 대상이라는 점에서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원주민인권선언이 나온 다음 세계 각국의 법률이 바뀌었던 것처럼, 유엔농민인권선언이 나오면 농민과 농업을 보는 시각이 크게 달라질 것이고, 또 달라져야만 한다.
경제성장과 발전 이데올로기는 도시 편향성을 그 핵심으로 한다. 산업화를 위해서라면 농민을 도시노동자로 만들고, 농촌을 포기하며, 식량을 수입하면 된다는 논리가 우리에게 주술처럼 씌워져 있었다. "촌스럽다"라는 인권침해적 언사가 버젓이 통용되는 사회다. 그러나 과거 장애인을 부르던 별칭이 이제 사라진 것처럼, 여성을 비하하던 말들이 적어도 공적 담론에서는 더 이상 통하지 못하는 것처럼, 농어촌과 농어민의 가치를 폄훼하던 관행 역시 조만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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