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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성 칼럼/10월 30일] 왜곡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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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성 칼럼/10월 30일] 왜곡의 정치

입력
2012.10.29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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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투시합에서 상대 선수 안면을 정확하게 가격하기는 매우 어렵다. 상대 선수가 날렵한 풋워크와 재빠른 몸 동작으로 공격을 피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안면을 강타하도록 가만히 멈춰 서있는 그런 권투시합은 현실에는 없다.

그런데 현실 정치에는 그런 이상한 권투시합 같은 게 드물지 않다. 자기가 공격하기 편리하게 상대방의 모습을 왜곡해 놓고 무자비하게 두드리는 이상한 공격이다. 목하 진행 중인 노무현 전 대통령 사초(史草) 폐기 공방이 대표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기간 대통령기록물 인계 문제를 논의한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민감한 문건의 내용과 함께 문건의 목록도 없애버릴 것을 지시했다는 조선일보 23일 1면 단독 보도가 그 발단이다.

노무현재단의 성명에 따르면 이 보도는 "전혀 사실이 아니"며 "완전한 날조"다. 노 전 대통령 퇴임 9 개월 전인 2007년 5월 22일 노 전 대통령 주재로 열렸던 수석비서관회의는 재임기간 민감한 기록의 은폐나 폐기를 협의한 자리가 아니었다. 대통령기록물법에 따르면 재임 중 생산된 대통령 기록은 공개기록, 비밀기록, 지정기록으로 분류된다. 지정기록은 비밀기록보다 한 등급 높은 비공개기록이다. 이날 수석비서관회의의 논의 주제는 그 분류와 관련된 문제였다.

노 전 대통령의 문제 발언은 공개할 기록 가운데 비밀기록이나 지정기록으로 분류된 내용이 연계돼 있을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하던 과정에서 나왔다. 공개기록을 국가기록원에 인계할 때 거기에 연계된 지정기록은 목록까지도 빼서 공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게 회의 결론이었다. 대통령기록물법 상 당연한 얘기인데 노 전 대통령은 그게 기술적으로 가능한지를 물었고 관련 비서관은 가능하다고 답변했다는 게 노무현재단측의 설명이다.

노무현재단측의 일방적인 주장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의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기억한다면 노무현재단의 설명이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할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기록대통령을 자처했다. 자신이 간여한 간담회나 회의, 정책결정 과정, 행사 등을 모두 기록으로 남기게 했다. 조선일보가 보도한 내용도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 장면을 녹화하도록 한 그의 고집에 따라 지금까지 녹화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는 일찍부터 대통령 활동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2007년 4월 제정 공포된 대통령기록물에 관한 법률도 그런 집념의 산물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재임 중 잘못을 은폐할 목적으로 대통령기록물법을 만들었고, 논란이 될 내용을 15년, 30년씩 공개하지 못하도록 묶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재임 중 특정 행위를 은폐할 생각이었으면 그런 법률 자체를 만들지 않고 관련 기록들을 폐기해버리면 그만이다. 김대중 정부 이전까지는 대통령 기록물에 관한 규정이 없어 퇴임 후 가지고 가든, 폐기하든 별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노 전 대통령 5년 재임기간 남긴 기록물이 825만여 건인데 그 이전 55년 동안 8명의 대통령이 남긴 기록물은 33만여 건에 불과하다. 이명박 대통령의 기록물은 한해 평균 13만 5,000건으로 노 전 대통령 시절 한해 평균 40만 건에 한참 못 미친다. 그런 기록 대통령을 새누리당은 '5,000년 역사 최초의 역사 폐기 대통령' '사초 파괴범'으로 몰아가고 있다. 현대판 분서갱유라는 말도 나왔다. 박근혜 후보는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앞뒤를 조금만 살피면 금방 사리가 분명해지는데도 그런 노력은 하지 않는다. 무지한 것인지 무지를 가장하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더 왜곡된 그림을 그려가며 상대방 공격에 매달린다. 그 공격은 통렬한 것 같지만 결국 가공의 허깨비를 때리는 것에 불과하다. 무조건 이기고 보자는 승리지상주의 앞에 사실관계와 진실은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관계를 호도한 공세는 국민을 속이는 일이다. 그런 엉터리 권투경기에 국민들이 박수를 칠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수석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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