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한국 미술계는 '제2의 백남준' 탄생에 한껏 들떠 있었다. 세계 최고 권위의 현대미술 전시 '카셀 도큐멘타' 역사상 백남준(1977년)에 이어 두 번째 한국 작가로 초청 받은 비디오 설치 작가 육근병(55)씨에 대한 해외 평단의 호평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카셀 메인 전시장인 프리데리시아눔 미술관 앞에 거대한 봉분을 세우고 그 안에 빔 프로젝터로 깜빡이는 눈 영상을 만들어 넣었다. 지금까지도 해외 초청전시를 가능케 한 '무덤 속의 눈'이란 작품이다. 꾸준히 이어진 해외 전시와 달리 14년 전 개인전을 마지막으로 국내 활동이 뜸했던 육씨의 대규모 개인전 '비디오크라시'(VIDEOCRACY·비디오에 의한 정치)가 12월 9일까지 서울 세종로 일민미술관 전관에서 열린다.
"우리가 놓치는 세계를 보려고 했습니다. '네가 서 있는 현장이 역사의 시작이고 증거'라는 말을 늘 하는데, '무덤 속의 눈'을 통해 조상의 육체는 죽었지만 정신은 살아남아 역사는 진행되고 있음을 말하고 싶었지요. 당시 제 작품이 관람객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제3자가 되어 역사와 관객을 응시합니다."
1995년 리옹 비엔날레 출품작으로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생존은 곧 역사'를 제외하곤 최근 작업한 5개의 오디오비주얼 설치작업이 전시장에 선보였다. 사람들이 무심코 밟고 가는 자리에 핀 작은 야생화를 촬영한 '운송(Transport)' 시리즈, 바람이 살랑거리며 하얀 천이 흩날리는 '무(Nothing)' 시리즈 등을 통해 그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존재하는 역사와 생명력, 가치 등을 은유한다. 과거 작품보다 한층 시적이며 관조적이다.
"변화라기보다는 진화가 적합한 표현입니다. 진화는 정체성을 전제로 하지만 변화는 때론 정체성을 없애버릴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거든요. 제 삶의 맥락이 있는 것처럼 작품의 맥락 역시 여전합니다. 제가 평생에 걸쳐 찾고자 하는 단 한 가지는 생의 본질이죠. 이번엔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육씨의 20년 지기로 이번 전시를 보기 위해 한국을 찾은 일본 구마모토시 현대미술관 전 관장이며 조시비 미술대학 교수인 미나미시마는 "세계미술계가 그를 중히 여기는 이유는 그가 쉼 없이 진지하게 작품세계에 몰두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젊은 시절 그의 작품은 시각적으로 강한 임팩트가 있었다. 이번 작품은 고요하고 자연스럽지만 힘은 훨씬 더 강력하다"고 평했다.
이번 전시는 육씨가 앞으로 진행할 프로젝트를 짐작하게 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지난 5년 여간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다큐멘터리 영상작업을 꾸준히 진행해온 그는 위안부로 고초를 겪다 캄보디아에서 생을 마감한 '훈 할머니' 다큐멘터리를 아카이브 형식으로 처음 출품했다.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된 작업으로, 그는 현재 국내에서 가장 많은 위안부 할머니 다큐 영상을 보유하고 있다. 또 내년 선보일 UN 프로젝트 준비 과정도 사진, 영상 등으로 소개하고 있다. 지난 10여 년간 193개국 UN 가입국 아이들의 눈과 노는 장면을 영상으로 촬영해온 것을 뉴욕 UN본부 외벽에 영상 설치할 예정이다.
이인선기자 kel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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