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이야기는 사실의 파편들과 이 파편들의 틈을 메우는 인간의 상상에서 비롯된다. 고로 완결된 내러티브를 갖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사실이 필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실의 왜곡과 은폐 과정이 필요한 법이다. 김기택의 시는 정확히 이 반대의 벡터(왜곡과 은폐와 상상력의 차단)로 나아감으로써 오히려 이야기성을 획득한다. 감정을 배제한 냉철한 대상 묘사, 현미경적인 세밀함이 이 시인의 특장인 바, 그의 시를 일컬어 '투시적 상상력'(문학평론가 이광호)이라 이름 붙인 까닭이다.
'목이 힘껏/ 천장에 매달아 놓은 넥타이를 잡아당긴다/ 공중에 들린 발바닥이 날개처럼 세차게 파닥거린다// 목뼈가 으스러지도록 넥타이가 목을 껴안는다/ 넥타이에 괄약근이 생긴다' ('넥타이' 부분)
'넥타이에 괄약근이 생긴' 바로 저 순간은 넥타이가 누군가의 목을 졸라 숨통을 끊으려는 순간이다. 이렇게 시인은 징그럽도록 대상을 냉정하게 묘사해 내부의 들끓는 힘을 드러내는 데까지 이른다. 김 씨의 여섯 번째 시집 는 바로 이 흐름에서, 삶과 죽음을 변주한다. 24일 만난 김기택 시인은 "시가 미리 울고 웃어버리면 독자가 할 일, 설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에 감정적인 언어를 빼고,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스케치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이 서늘한 서술이 20여년 전 한국시단에서는 너무나 독특해 아무나 맛볼 수는 없는 미감으로 손꼽혔으니, 시인은 "세 번째 시집 부터 , 에 이르는 전작에서는 이해하기 쉬운 시를 쓰기 위해 노력했다"고 덧붙이며 이렇게 말했다. "요즘은 제 시를 고등학생도 본다고 하더라고요. 약간 혼란스럽게 시행을 배치해도 이제 독자들이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번 시집 첫 머리에 이전의 김기택과 가장 다른 시를 배치한 이유가 여기 있을 터다.
'벌어진 입과 귓구멍 콧구멍에 무한을 가득 채운 채 끝없이 투명한 공기에 매장되어 있습니다. 막힘 없이 펼쳐진 하늘에게 목 졸리고 숨구멍 막히고 팔다리 결박되어 우주 쓰레기들과 함께 떠돌고 있습니다.'('우주인 2' 부분)
'손가락들은 목과 뒷덜미를 긁고/ 모가지들은 아무리 기웃거려도 움직일 생각 없는 창밖을/ 연신 두리번거린다/ 꿈쩍도 하지 않는 버스를 움직여보려는 듯/ 발들이 동동 구른다'('금단 증상' 부분)
사랑하는 이의 몸을 파고들고 파고들고 파고들어 '보면' 그것은 한 낱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고, 그래서 실재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현실과 상상을 두루 통과해야 한다고, 지젝이 말했던가. 시의 주체를 사람이 아닌 벌어진 입과 손가락들, 모가지들, 발들 같은 신체 일부분이 대체하는 건 그의 시가 묘사에서 세부묘사, 정밀묘사로 이어짐을, 그리하여 그가 부르는 노래를 머릿속에서 이미지로 재현할 때 독자는 이전보다 더 많은 상상력을 동원해야 함을 뜻하겠다. 이렇게 죽음의 순간을 강렬하게 그린 몇몇 시편을 건너가면, 시집은 전작 과 마찬가지로 산업사회의 비인간화 현상과 비인간 도시의 풍경들,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와 인간적 삶의 파탄 등을 그리고 있다. 정적인 상태부터 동적인 정황까지 묘사의 대상과 방식이 다양해진 것은 이번 시집의 변화다. 표제어 '갈라진다 갈라진다'가 들어있는 시 '커다란 나무'는 이런 특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나뭇가지들이 갈라진다(…) 제 몸통에서 빠져나가는 수많은 구멍들이/ 다 제 길이라는 듯 갈라진다/ 갈라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 조금 전에 갈라지고 나서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독자가 오감과 기억을 깨워 스스로 이미지를 그리는"'김기택 스타일'은 이번 시집에서도 자유자재로 변주된다. 시단과 대중이 두루 그의 시를 찾는 이유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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