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축구선수로 불렸던 선수가 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천재'로 불리다가 스산하게 사라져간 스타들이 우리에겐 무수히 많지만, 이 선수는 그 중에서도 특별하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나이에 월드컵에 나가 푸른 그라운드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나는 같은 나이에 학교 옆 낡은 당구장 푸른 당구대에서 암약했다. 월드컵 후에 이어진 K리그에서 그는 사기 캐릭터로 불리며 리그를 초토화시킨다. 소속팀(울산)을 우승시켰고, 재치 있고 때로는 공격적인 언사로 언론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빠른 발과 정교한 프리킥을 가졌고, 그라운드 안에서는 리더십도 보여준다. 축구 선수 중에 가장 뉴스에 많이 나타났으며, 지금은 30대 초반이 되었다. 소속팀이 없고, 가끔 조기축구회나 아마추어 동호회에 끼어 공을 찬다는 소문이 있다. 이쯤 되면 방금 남파된 간첩도 그 선수가 누군지 알 것이다. 그렇다. 이천수다.
그런 그가 요즘 사과를 하고 다닌다. 몇 달 전에는 구단(전남) 사무실에 찾아가더니, 최근에는 경기장에 홀연 나타나 축구를 보러 온 관중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했다. 정장차림에 그가 90도로 허리를 숙여 사과를 하는 장면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새로웠다. 어쨌든 이천수는 사과를 하고 있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이 토라진 애인에게 하는 사과만큼의 성심성의를 그가 다하는 것 같지는 않다. 구단도 그의 사과에 별 감동을 보이지 않는다. 언론도 지나가는 이슈로 그 소식을 다룬다. 올 시즌도 반 이상이 전개되었고, 그가 그라운드에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다음 시즌이다. 골을 넣고 속옷에 K리그를 사랑해주라고 써넣은 메시지를 보여주던 이천수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그 선수가 이렇게 사라지고 있다.
물론 그는 다른 축구선수에 비해 사고를 참 많이 쳤다. 해외 진출을 위해 구단에 이른바 땡깡을 놓기도 했고, 훈련을 불성실하게 한 적도 있으며, 심판에게 주먹감자를 먹이기도 했다. 팀 감독과 코치를 모욕하고, 제멋대로 해외로 이적했다. 심지어 잘 생기지 않은 주제에 여자 연예인과 염문을 뿌리고, 공항에는 명품을 끼고 나타난다. 우리는 대체로 이천수에게 화를 내고 있는데, 그가 잘못한 정도와 우리가 화를 내는 정도를 놓고 객관적으로 비교를 해보는 작업도 필요할 것이다. 그는 어쨌든 그라운드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선수고, 약물을 복용하거나 음주운전을 한 적은 없다. 폭행으로 유치장 신세를 지지도 않았다. 승부조작에 관련된 것도 아니다. 그가 한 행위는 어쨌든 범죄는 아니다.
약물을 복용하거나, 군대를 기피한 연예인이 자숙기간을 거쳐 복귀하고 대중의 사랑을 다시 받는 경우가 있다. 회사에서도 큰 실수를 저지르면 시말서를 쓰고, 다시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한다. 해고를 당하더라도, 다른 회사에 들어갈 가능성이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당구장에서 암약할 때,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두 달 정도 일하고, 원장의 횡포와 여러 불만을 이기지 못하고, 휴대전화 번호를 바꾸고 잠적을 했다. 조금의 소동이 있었지만, 결국 원장의 용서로 사건은 해결됐다. 나는 내 무책임함에 크게 반성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사과를 했고, 1년 후 다른 학원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이천수는 몇 번 잘못을 저질렀고, 몇 번 구제를 받았고, 이제는 구제 받을 일이 요원하다. 그가 거짓으로 반성을 하고 있는지, 사과에 진정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구단과 프로연맹의 처사가 합리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천수에게 크게 삐친 구단은 기업 구단임에도 하위 스플릿에서 신생팀이나 재정이 열악한 시민 구단과 강등을 놓고 경쟁하고 있다. 프로구단의 최고 덕목은 좋은 축구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다. 만약에 내년 시즌을 2군에서 출발하게 된다면 사과를 할 사람은 이천수가 아니라 구단 수뇌부가 아닐까. 정 이천수란 선수를 쓰기 싫다면 일단 임의탈퇴 처분을 풀고, 다른 구단에 넘기는(파는) 수도 있었다. 트레이드를 통해 전력을 상승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현금이 생길 수도 있다. 그 와중에 이천수를 원하는 구단이 전혀 없을 때, 이천수는 진정 축구를 그만 두어야한다. 이런 은퇴가 자연스럽다. 하지만 지금의 상태는 자연스럽지 않다.
사람은 감정이 있다. 미운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 사람을 용서하기 싫을 수 있다. 하지만 구단은 사람이 아니다. 조직이고, 회사다. AFC의 압박에 의해 독립법인까지 됐다. 감정적 처신이 아닌, 합리적 처분이 내려지길 기대한다. 어디서든 그라운드를 진흙탕으로 만드는 미꾸라지의 드리블이 보고 싶다.
서효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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