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쌍용차에서 희망퇴직을 강요당한 노동자의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스물 세 번째 희생자였다. 스물 두 번째 희생자가 난 4월 이후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은 대한문 앞에 분향소를 설치했다. 시민들이 이곳을 찾기 시작했고 쌍용차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높아졌다. 결국 쌍용차 정리해고 청문회가 국회에서 열렸다. 청문회는 대규모 정리해고를 정당화한 쌍용차의 경영위기가 상하이 자동차와 회계법인이 공모해 조작한 허구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당시 정부는 이를 알고도 묵과했다.
김정우 전국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희생자들의 죽음은 4개월을 넘기지 않고 이어졌었다. 스물 세 번째 죽음은 스물 두 번째 죽음이 있고 6개월이 지난 후 찾아왔다. 대한문 앞 분향소와 그곳에 모아진 사회적 관심이 스물 세 번째 죽음을 두 달 연기시킨 것이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은 경찰에 연행되고 병원에 실려 가며 겨우겨우 대한문 앞 농성을 이어갔다. 그리고 겨우겨우 국회 청문회가 열렸다. 사람들이 조금씩 쌍용차 정리 해고 문제의 본질을 알아가는 듯했다.
그런데 또 다른 희생이 생겼다. 그 모든 노력의 결과가 그저 두 달 가량 희생을 지연시키는 정도에 불과했던 것인가. 김 지부장은 더 이상의 죽음을 막겠다며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는 김 지부장뿐만이 아니다. 현대차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최병승씨는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송전탑에 올라 자신의 몸을 밧줄로 옭아맸다. 대법원이 현대차 사내하청이 불법파견이고 2년 이상 근무한 노동자는 정규직 직원이라고 판결을 내렸음에도 사측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일부' 단계적으로 신규채용하겠다는 미봉책으로 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 있다.
또 다른 사업장의 노동자도 위험한 농성을 선택했다. 홍종인 금속노조 유성기업 아산지회장은 회사 정문 앞 굴다리 위에 금방이라도 부서져 땅으로 곤두박질 칠 것 같은 허술한 임시 구조물을 설치하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국정감사를 통해 사측과 컨설팅 업체가 공모해 노조를 파괴하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사측은 어용노조를 설립하고 부당 노동행위를 이어가고 있다. 홍종인 지회장은 노조파괴를 주도한 책임자를 처벌하고 해고자를 복직시키고 어용노조를 해산하고 노동자들과 사측이 교섭에 나설 것을 촉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이들은 왜 단식농성과 고공농성을 하는가. 이들은 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가. 이미 크나 큰 고통을 겪어온 이들이 왜 또 다시 고통스런 방식을 택해야 하는가. 이유는 명백하다. 입법부인 국회와 사법부인 법원이 사측의 불법행위와 책임을 밝혀냈음에도 불구하고 사측이 꿈쩍도 않기 때문이다. 행정부 또한 뒷짐을 지고 노동자들의 희생을 수수방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대선 후보들은 경제 민주화 공약을 내세우고 있다. 디테일에서는 차이가 있을 지 모르겠지만 큰 얼개는 유사하다. 이들의 경제 민주화는 복지와 성장의 균형, 일자리 창출, 재벌 규제라는 공식으로 압축된다. 이런 의문이 든다. 대선 후보들은 경제 민주화의 수혜를 보는 경제주체에 생존과 존엄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노동자들을 포함시킬까?
경제 민주화는 시장 중심주의가 가져오는 폐해를 개선하려 하며 그 정신은 헌법에 명시돼 있다. 이에 대한 법적 해석은 분분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 민주화를 주주나 이해당사자 사이의 공정한 자원분배 문제로 국한시킨다면 우리가 놓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시대에 독주하는 시장이 위협하고 파괴하는 인간적 삶이다.
노동자들은 왜 곡기를 끊고 높은 곳에 오르는가. 그들은 주주나 이해당사자의 자격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인간적 삶을 지키기 위해 그러는 것이다. 공정한 경쟁이라는 말도 그들에게는 사치스러울 지경이다. 대선 후보들은 알아야 한다. 어떤 이들에게 경제 민주화란 이제 삶과 죽음의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심보선 시인 경희사이버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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