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그 해 봄은 유난히 을씨년스러웠다. 한해 전 YS, JP와의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이 국회의석 대부분을 장악하는 거대여당이 됐다. 비교적 온건하던 노태우 정부는 이때를 기점으로 눈에 띄게 강경분위기로 바뀌어갔다. 88서울올림픽의 성공개최로 인한 국민적 자부심과 축제열기는 언제였던가 싶게 사람들 기억에서 아득해졌다. 새해 신학기가 되면서 대학마다 교내문제, 시국문제가 뒤엉킨 시위가 폭발했다. 도처에서 다시 무자비한 진압행태가 재현됐다.
■ 4월 명지대생 강경대가 경찰에 쫓겨 학교 담장을 넘다 곤봉에 타살됐다. 이후 전남대, 안동대, 경원대 등에서 분노한 대학생들의 분신자살이 줄을 이었다. 시인 김지하가 보다못해 분노의 일갈을 내뱉었다. "한 개인의 생명은 정권보다 크다"며 "(당장) 그 소름 끼치는 죽음의 찬미,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고. 그리고도 사흘 뒤 새벽 서강대 옥상에서 재야단체 간부 김기설이 분신 투신했다.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유서 두 통을 남긴 채.
■ 당일 오후 서강대 박홍 총장이 기자회견을 자처해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재야 운동권에선 분신순서까지 정해 놓았다더라"는 등의 온갖 루머가 난무했다. 검찰총장은 "분신의 조직적 배후를 색출하라"고 지시했다. 곧바로 김기설과 같은 재야단체의 간부 강기훈이 체포됐다. 유서를 대신 써주며 죽음을 사주했다며. 일관된 부인에도 불구, 강씨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감정 결과만을 근거로 실형을 선고 받았다.
■ 유서대필 사건이 드레퓌스사건과 비견되는 건 국가공권력에 의한 진실왜곡 구조와, 필적이 핵심단서가 된 점 때문이다. 당시 필적감정과정이 허위로 드러나고서야 겨우 이 사건에 대한 재심결정이 최근 내려졌다. 사실은 이제 곧 바로잡히겠지만 새삼 떠올려지는 그 시절 기억은 아프다. 광기(狂氣)의 사회분위기 속에서 이성이 다시 질식돼가는 모습을 참담하게 지켜봐야 했던 기억이다. 벌써 20여 년, 그 몰이성의 시대로부터 우리는 과연 얼마나 많이 와 있을까.
이준희 논설실장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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