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과 장난감 블록, 각자 재주를 뽐낸 그림과 수공예작품 전시, 창에 오려 붙인 이름표 달린 종이 물고기, 건물 밖 샛노란 스쿨버스까지. 고요한 아침, 사람이 빈 공간을 채운 잡동사니들은 누구라도 어린이집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오전 10시 무렵 이 아기자기한 공간에 나타난 주인공들은 허리 굽은 할아버지,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들이다. 이들은 어린이집 원생들이 그렇듯 집 앞까지 찾아간 버스를 타고 사회복지사의 부축을 받으며 등원했다. 혈압 및 피부상태 점검 등 간단한 건강검진이 출석 확인을 대신한다.
경기 시흥시 함현상생종합복지관의 은빛사랑채는 '저소득 등급외자(경증) 치매 노인 전용 주간보호센터'란 긴 이름이 따라붙는다. 각종 프로그램과 수업방식, 활용되는 소품들은 비슷하되 원생들의 나이만 다르니 어린이집에 빗대 '어르신집'이라 불러도 무방하겠다.
오전 10시30분 시작된 수업(생활체조)은 '늙으면 아이 된다'는 속담이 딱 들어맞는다. 아이들마냥 몸은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고, 헷갈리는 거 투성이다. 재잘재잘 흥겨운 수업 분위기도 그렇다.
예컨대 강사와 노인들의 대화는 이렇다. "허리 굽히기 3번 해볼까요." "저 할멈 4번 했어, 3번인데. 하하하." "엄지와 중지를 이렇게 해보세요." "뭐가 중지여? 잘 안보여." "몸을 오른쪽으로 틀어보세요." 절반 가까이가 왼쪽으로 틀다가 얼른 바꾼다.
미술치료 시간엔 화가의 지시에 따라 도화지에 노란 해를 칠하고 산봉우리와 땅, 나무, 사람도 그려 넣는다. 그때마다 화가의 질문이 이어진다. "싸이 아세요." "몰라 그런 거." "손주들이 좋아합니다. 우리나라를 빛냈어요." "사람이야?"
어르신집의 시간은 느릿하게 흘러간다. 그림을 그려도 놀이를 해도 한참이 걸린다. 다들 거동이 불편하기도 하지만 내달려온 세월의 속도를 줄이듯 여유롭다. 설령 동료가 뒤처지더라도 타박하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린다. 그래도 남보다 잘한다는 칭찬을 받으면 기분은 좋다. 유성자 은빛사랑채 센터장은 "동년배집단에서 서로 위안을 얻고 약간의 경쟁을 통해 긴장과 자극을 받으니 치매 증상이 악화하지 않는다"고 했다.
점심식사 이후 오후 3시까지 이어지는 자유시간엔 각자가 원하는 활동을 할 수 있다. 물리치료를 받기도 하고, 목욕을 하기도 하고, 오순도순 모여 화투나 마작을 하기도 한다. 일부는 민요를 들으며 그림책을 읽는다(혹은 본다). "집에 있으면 그냥 누워있지. 뭐 할일 있나." "TV는 시끄러워 못 봐. 여기오면 사람이 많으니까 할게 많지."
노인들이 소근거리는 과거는 앞뒤가 맞지 않기 일쑤다. 보통의 합리와 논리는 통용되지 않는다. 그래도 대화는 자연스레 이어진다.
배모(91) 할머니: "아빠 엄마가 공부도 안 시키고 죽었어. 혼자 살아. 여기서 한글 배워서 이제 신참 오면 가르친다니까. 저 이도 나한테 배웠어. 내가 장해. 고맙고."
지명 당한 무명 할머니: "냉장고? 내 손이 냉장고야. 만져봐, 차지. 귀가 먹어서 안 들려. 그래서 난 말만 해."
다들 기억하고 싶은 것만 간직하고 있지만 사실 각자 아픈 사연 탓에 치매라는 상실의 늪에 빠졌다. 국가유공자임을 자부하는 장모(80) 할아버지는 딸 쌍둥이가 죽고, 막내 딸 사위마저 재산을 날리고 잠적하자 치매 증상이 심해졌다. 하지만 치매 심사를 받는 날이면 희한하게 상태가 좋아져 매번 등급외 판정을 받았다. 그나마 센터에 다니면서 한결 나아졌다.
센터에 다니는 15명은 모두 저소득층이면서 경증 치매를 앓고 있다. 정부의 치매 등급판정 기준이 신체기능 중심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거동을 하거나 간헐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증 치매 노인 대부분은 등급외자 판정을 받을 수밖에 없다. 등급 인정점수를 낮추고 심사 기준을 완화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사각지대에서 방치되고 고통 받는 노인들이 많다.
그러니 센터의 어르신 15명은 운이 좋다고 할 수 있다. 안정욱 함현상생종합복지관장은 "등급자의 상태가 호전→등급 탈락해 등급외자로 방치→증상이 다시 심각해지는 악순환을 끊으려면 일본처럼 국가 차원의 등급외자 주간보호도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 센터장은 "치매는 관리와 치료만 꾸준히 이뤄지면 분명히 상태가 좋아진다"며 "표정 없던 얼굴이 조금씩 밝아지는 게 신호"라고 했다.
현재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은 전국 10곳의 어르신집, 150명에게 지원을 하고 있다. 올해 등급외자가 15만명 가량인 걸 감안하면 1,000명 중 한 명만 혜택을 누리는 셈이다.
오후 3시 웃음치료 시간이 되자 노인들이 모두 모여 앉더니 합창을 했다. "괴로워도 슬퍼도 아파도 일단 웃어봐요. 내가 웃으면 자식들이 웃음꽃이 피어요. 나는 점점 좋아지고 있다. 나는 점점 나아지고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최고다. 나는 나를 너무너무 사랑한다."
이미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한마디 했다. "치매는 절대 안 걸리겠네." 폭소가 터졌다.
고찬유기?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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