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노태우 정권 4년째이던 1991년 발생했다. 그 해 전반기 시국 상황은 명지대생 강경대군이 반정부 시위 중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면서 4ㆍ27 범국민대책회의가 결성되는 등 혼란 그 자체였다. 이후 6월29일까지 전국적으로 크고작은 집회와 시위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분신 또는 투신해 숨진 이들만 13명에 달했다.
강기훈씨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그 해 5월8일 김기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이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분신, 사망하면서였다. 김씨 분신 현장에서 유서 2장이 발견됐는데, 서울지검 강력부는 김씨의 유서가 친필이 아니라며 강기훈 전민련 총무부장을 유서 대필자로 지목해 수사를 시작했다.
검찰은 숨진 김씨 집과 동사무소, 근무했던 군 부대에서 필적을 입수했다. 검찰 수사 이후 명동성당에 피신했던 강씨는 수사망이 좁혀오자 6월24일 검찰에 자진 출두해 구속됐다. 이후 검찰은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 감정 결과 등을 근거로 "강씨가 김씨의 유서를 대신 써줬다"며 강씨를 자살방조 혐의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당시 국과수 감정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문서분석실장 김형영씨가 뇌물수수죄로 구속되면서 감정의 신뢰성이 흔들렸고, 강씨도 자신의 필적이 아니라는 주장을 고수하면서 수사 내내 논란이 됐다.
대법원은 1992년 7월24일 강씨에게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6월을 선고했고, 강씨는 복역 후 1994년 8월17일 만기 출소했다. 당시 검찰 수사의 주임이었던 신상규 검사와 안종택 검사는 모두 검사장으로 승진했고, 신 검사는 검찰총장 후보로까지 거론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또 사건을 지휘한 강신욱 당시 서울지검 형사1부장은 이후 서울고검장을 거쳐 대법관을 지냈다.
그러는 사이 사건은 조용히 묻혀지는 듯했다. 하지만 2005년 5월6일 국회의원 113명이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재조사를 촉구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2006년 4월25일 조사에 착수, 국과수와 7개 사설 감정기관 등을 통해 1년6개월 간 사건을 분석했다. 진실화해위는 2007년 11월13일 "강씨의 대필은 없었다. 김씨 친필 유서가 맞다"며 국가의 사과와 재심 등의 조치를 권고했다.
진실화해위 권고가 나오자 강씨는 2008년 5월8일 서울고법에 재심 개시 결정을 요구했다. 서울고법은 2009년 9월15일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고, 검찰은 법원의 결정에 반발하며 대법원에 즉시항고했다.
검찰의 항고에 따라 대법원은 재심 개시 결정에 대한 최종 판단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후 3년이 지나도록 특별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결정을 미뤄왔다. 수많은 추측과 의혹의 와중에서 대법원은 19일 늦은 오후, 조용히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정재호기자 next8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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