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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10월 19일] 시장경제 길들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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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10월 19일] 시장경제 길들이기

입력
2012.10.18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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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선진'경제란 역사의 어느 시점에선가 진보정치에 의해 길들여진 '수정된' 시장경제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시장경제 국가들도 이런저런 위기를 거치며 선진국의 문지방을 넘었다. 시장경제의 위기는 경기변동에 의한 것도 있지만 전쟁이나 노동자의 저항과 같은 정치적 도전에 의해서도 촉발됐다.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은 국가와 사회가 시장을 길들이는 과정이기도 했다. 시장도 자기를 품고 있는 공동체를 벗어나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늘 공존의 해법을 받아들이며 진화해 왔다.

시장경제 길들이기의 가장 고전적인 해법은 노동문제 해결 과정에서 발견된다. 시장경제의 한 축이기도 한 노동자들의 체제 도전을 제도권 내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타협이 불가피했다. 그 타협의 조건에 따라 시장경제의 성격도 조금씩 달랐다. 생산에 대한 협조의 대가로는 복지국가와 완전고용, 그리고 산업민주화 같은 것이 제시됐다. 이런 타협은 어쩔 수 없이 대대적인 이해관계의 재편과 권력의 이동을 수반하기 때문에 치열한 갈등과 저항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힘의 대결에서 시장의 반발을 제어할만한 사회적 억지력이 있을 때 복지국가와 완전고용은 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유럽의 사민주의 정당들은 집권을 넘볼 정도로 성장했다. 유럽 대륙만의 얘기도 아니다. 자유주의적 발전의 교과서인 미국은 1930년대 뉴딜개혁을 거쳤고, 영국도 전후 선거에서 전쟁영웅 처칠을 패배시키면서까지 베버리지 복지개혁을 추진했다.

2012년 대선에서 경제 민주화와 복지국가, 고용안정이 3대 핵심 쟁점으로 떠오른 것도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 시장경제와 사회의 공존 방정식을 찾지 못했던 것이고, 이제야 밀린 숙제를 하는 셈이다. 외환위기를 거치고 나서 우리 사회는 시장경제를 신주단지 모시듯 했다. 정부는 관치경제의 혐의를 씻기 위해 시장에서 철수를 서둘렀고 노동조합은 비타협과 투쟁과잉으로 신뢰를 잃어갔다. 시장은 고삐가 풀린 채 고용안정의 가치를 소홀히 하고 사회통합을 위협했다. 승자독식과 양극화를 견디지 못하는 약한 고리들이 끊어져 나갔다. 고용의 붕괴와 분배의 악화는 최고의 자살률과 최저의 출산률을 거쳐 여러 형태의 사회병리 현상으로 확산되고 있다. 대선 후보들이 앞 다투어 사회통합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본질을 파고들면 시장과 사회를 어떻게 타협시킬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런데 우리도 서구와 같은 그런 역사적 타협이 과연 가능할까? 타협은 선의가 아니라 세력균형의 산물인데 한창 잘 나가는 시장권력에 맞설 국가권력, 사회권력은 보잘 것이 없으니 말이다. 노동운동은 이미 사회변화의 에너지를 다 소진해버렸고 서구적 의미의 진보정당은 존재감조차 없다. 심지어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한 대통령의 고백도 있었다. 경제 민주화와 복지국가 담론이 아무리 무성해도 서구의 경험이나 정치이론에 비춰보면 그럴듯한 타협이 나오기 어려운 구조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이유는 여기가 한국이기 때문이다. 우리 나름의 산업화와 민주화 모델을 성공시켰듯이 사회발전도 한국 스타일로 못할 이유가 없다. 10년을 버티는 정당이 가뭄에 콩 나듯 해도 한국 정치의 역동성은 순식간에 개혁의 돌풍을 만들어 내곤 했다. 노조나 정당이 지리멸렬하며 자기 역할을 못해서 그렇지, 파편화된 사회저항과 변화의 아우성은 이미 위험 수위를 넘었다. 촛불집회와 용산참사, 쌍용차사태와 희망버스를 겪으며 사회변화의 에너지는 축적돼 왔다. 오죽하면 보수정치의 본산인 새누리당이 복지한국과 경제민주화의 기치를 내걸었겠는가.

이 과정에서 눈여겨볼 점이 다른 어느 때보다도 지식인들의 선거캠프 참여가 많다는 사실이다. 상아탑을 팽개치고 권력을 좇는 폴리페서들이 갈수록 늘어난다는 개탄의 소리도 있지만 사회개혁의 요구가 그만큼 팽배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조선시대 개혁사림들이 백성들의 아우성에 못 이겨 목숨을 걸고 개혁정치를 도모했듯이 폴리페서들도 역사의 변곡점에서 사회발전의 물꼬를 돌려놓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최영기 경기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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