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은 백제와 고구려, 신라 정권을 모두 거치면서 발전한 독특한 지역이다. 용산을 포함한 한강 유역에 최초로 정치 세력이 등장한 것은 초기 백제였다. 이후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백제는 한강유역을 고구려에 내주고 웅진으로 천도, 용산지역은 77년간 고구려 통치를 받았다. 삼국이 통일되면서 용산은 신라지역이 된다. 용산이라는 지명이 기록에 처음 나타난 것은 백제 기루왕 21년(기원후 97년)때로 그 해 한강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났다고 한다.
■ 용산은 전국의 조운선이 몰려드는 포구였고, 한강에서 활약하는 경강상인의 본거지였다. 1905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제는 용산에 군사기지와 철도기지를 세워 대륙침략의 거점으로 삼았다. 용산이 수륙교통과 군사적 요충지가 된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이 지역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외국군 주둔지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해졌다. 하지만 2007년부터 철도기지창 부지와 주변 땅에 복합타운을 조성하는 대형 건설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이 일대가 활기를 찾고 있다.
■ 용산국제업무지구(용산역세권) 개발사업이라는 이 프로젝트는 사업규모가 31조원에 달하고 국내의 대표적인 금융회사와 건설사 등 30개사가 출자를 했다. 4대강 사업에 22조원, 새만금 사업에 21조원이 투입된 것과 비교하면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다는 620㎙짜리 111층 빌딩을 비롯해, 연면적 330만㎡(100만평)에 코엑스 6배 크기의 지하 쇼핑몰과 호텔, 오피스텔 등 23개 초고층 빌딩이 2017년까지 세워진다.
■ 단군이래 최대 사업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 사업이 갑자기 좌초위기에 처했다. 시행사인 드림허브 1, 2대 주주인 코레일과 롯데관광개발이 개발방식과 주도권을 놓고 갈등을 빚기 때문이다. 부동산 시장의 침체로 사업성이 떨어진 것이 갈등의 주요 원인이다. 문제는 사업이 중단되면서 토지보상금 등을 예상하고 사업자금이나 생활비를 수 억원씩 빌린 주민들이 난감한 상황이라 '제2의 용산 참사'를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오늘 이사회가 열린다니 지켜볼 일이다.
조재우 논설위원 josus6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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