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유럽연합이 선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뜨악해 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올해 노벨 평화상 만큼, 안 그런 적이 없었지만, 정말이지 싱겁고 떨떠름한 것도 없을 것이다. 숫제 노벨상 선정 자체를 다시 짚어보자는 여론도 비등하다고 외신은 전해 준다. 아무튼 유럽연합이 상을 탔다는 소식에 정작 유럽 주민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소식을 듣자 하니 그리스에선 아예 노벨 평화상 보도를 극도로 자제하는 분위기라 한다. 그리스가 어디인가. 자본주의가 바야흐로 등장할 무렵, 몰락 중에 있던 귀족들이 자신의 자제들을 그랜드 투어란 이름으로 유럽 문명의 원산지라고 여행시킨 바로 그 곳 아니던가. 새로운 세계의 기원으로서 축성(祝聖)을 받은 유럽의 배꼽, 그곳이 그리스 아니던가. 그런 유럽의 총아가 이젠 유럽의 왕따가 된 건 정말 역사의 농간이라 불러야 좋을지도 모르겠다.
서글프게도 그리스는 이제 유럽이 짐 져야 하는 천덕꾸러기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유럽이 그리스에 벌인 전쟁이라고 부를 만큼, 그리스는 갖은 위협에 시달리는 중이다. 물론 그 위협의 이름은 긴축이다. 재정적자를 일삼는 그리스 정부는 새로운 자본주의 정부의 미덕인 균형예산을 위해 갖은 수단을 강구해야 한단다. 유럽인이 고생해 벌어놓은 돈을 배짱 좋게 까먹으며 무위도식하는 기생적인 국민이 그리스인들이라고, 유럽연합은 기세등등하게 몰아붙이고 있다. 아마 그리스인이라면 "감히, 네가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하다니!"라고 분개할 법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 하더라도 의문은 왜 하필 유럽연합이냐는 것이다. 유럽을 진두지휘하는 것은 유럽중앙은행일 텐데, 애꿎은 유럽연합에게 하필 상을 주냐는 것이다. 상은 정작 유럽중앙은행에게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게 우리 시대의 평화를 둘러싼 알레고리를 잘 증명해준다는 생각이다. 알다시피 유럽을 장악하고 유럽 내부에서 새로운 식민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악명 높은 유럽 트로이카이다. 유럽연합, 유럽중앙은행 그리고 최근 유럽이 미국으로부터 탈환했다고 너스레를 떠는 국제통화기금(IMF), 이 삼자가 유럽의 나라들을 길들이기 위해 너스레를 떨고 있다는 것은, 굳이 유럽 소식에 눈이 밝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훤한 사실이다. 물론 문제는 그리스만은 아닐 것이다. 세계사 수업 시간에 아무리 졸았어도 스페인, 포르투갈이 유럽 문명을 이끈 나라들이란 건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21세기의 부자 유럽 나라들은 배은망덕하게 이 나라들에게 배부른 복지 따위는 잊고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윽박지르고 있다. 애국심 따위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나이지만, 내가 그리스인이었다면 다분히 서럽고 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외려 그런 면에서 유럽연합은 적절한 노벨평화상 수상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유럽연합이 노벨평화상 수상에 부적절하다는 호사가들의 논란은 코미디라고 말해야 옳다. 우리 시대의 평화란 자본을 위한 평화 아니던가. 그 탓에 유럽연합만큼 자본의 안녕을 위해 궂은일을 마다 않은 인물이 어디 있을까. 유럽연합은 기꺼이 자본주의의 안녕을 위해 최전선에서 분투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럽연합이 이윤의 평화, 이자의 평화를 위해 전심전력 애쓰고 있다는 점을 반박하지 않아야 한다.
사실 평화의 파괴자는 자본의 편에서는 항상 빚을 떼먹는 채무자, 버릇없이 임금을 올려달라는 노동자, 제 때에 퇴직하고 연금을 달라고 투덜대는 고령자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자본주의의 탈레반, 알카에다 등일 것이다. 그러므로 유럽 질서의 파괴자인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정부는 유럽 평화의 적일 것이다. 따라서 당연 세계평화의 수호자로서 유럽연합을 꼽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렇지만 빚을 갚지 않겠다는, 차라리 채무불이행을 선언하자고, 배 째라고 외치는 유럽 시민을 유럽인이 아니라고 우길 수 없다. 지난 유럽의 세기는 바로 그들, 노동하는 자들이 세운 시대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제 노벨 평화상의 억지를 헤아리며 폐지를 생각해 볼 시점이 왔다. 노벨평화상은 실상 자본의 평화상이겠기 때문이다.
서동진 계원예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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