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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예인들 작품의 단절 잇는 심정으로 이제 우리 서사의 울창한 숲에 들어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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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예인들 작품의 단절 잇는 심정으로 이제 우리 서사의 울창한 숲에 들어선 듯

입력
2012.10.18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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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 이야기를 쓰겠다고 작정하고, 처음에는 19세기쯤에 갖다 놓고 그냥 허황한 민담조의 서사를 쓰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시작해보니 우리네 그맘때의 현실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올해는 대선이 있어서 더욱 실감할 수 있지만, 돌이켜보면 '근대적 잔재'의 상처가 지금도 우리 속에 내면화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흔히들 하는 말로 18세기 영ㆍ정조 시대를 근대의 맹아기(萌芽期)라고 하는 데 비하여 19세기를 반동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세도정치와 삼정문란으로 낙후된 봉건왕조가 붕괴되는 전환기에 그동안 성숙해졌던 조선 민중의 자생적 근대화에 대한 역량이 제국주의 외세의 개입으로 좌절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자생적 근대화 운동의 절정이 바로 동학혁명인데 내후년이면 그때로부터 120년이 되는 셈이라, 상원갑 하원갑 얘기로는 원래 갑자(甲子)로 헤아리지만 동학 원년인 갑오년으로 따진다면 이제부터야말로 내년을 끝으로 통일 개벽 시대가 열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 소설의 화자는 시골 양반과 기생 첩 사이의 서녀인데 주인공 역시 중인의 서얼로서 두 사람은 인연을 맺게 된다. 화자의 추적을 통하여 전기수에 강담사, 재담꾼이고 광대물주에 연희 대본가이며, 나중에는 천지도에 입도하여 혁명에 참가하고 교주의 사상과 행적을 기록하는 역할을 하다가 생을 마감하는 이야기꾼의 일생이 드러난다. 주인공은 쫓아다니는 여인이 만나는 사람들마다 전해주는 일화에 의하여 그 행적이 모자이크 벽화처럼 형상을 드러내면서 화자와 주인공은 그 과정을 통하여 함께 의식이 깨이고 성장해간다.

나는 너무 리얼한 역사의 재생을 어느 정도는 피하기 위하여 이를테면 동학을 천지도로, 실제 인물은 조금씩 바꾸거나 몇몇 인물을 유형적으로 합쳐놓거나, 이름도 몇 자씩 바꾸거나 자와 호를 이용하기도 했고, 공연 또는 놀이판 장면에서는 당시의 민요, 판소리, 연희대본, 언문소설 등을 인용하기도 했다.

구한말 당시에 작자미상인 언패(諺稗) 소설은 백 수십여 종이 출판되어 책전에서 팔렸으며, 이를 읽어주는 전기수만 하여도 한양은 물론이요 지방 저자거리마다 있었고, 이야기꾼 강담사 역시 하나의 직업이 될 만큼 고을마다 있었고, 이들 서사가 음악으로 옮겨간 판소리 광대는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했다. 이들이 각자의 당대를 어떻게 살았으며 어떻게 죽어갔는지 알 길은 없으나, 예인들이 남긴 여러 작품이 내 소설의 출발점이 되었다. 우리 근대문학은 이들과 단절되어 제국주의의 침입과 함께 이식문화의 일종으로 출발하게 된다. 나는 그 단절을 잇는 오솔길을 찾아가는 심정으로 이 이야기를 썼고, 이제 우리 서사의 울창한 숲에 들어선 느낌이다.

소설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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