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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10월 17일] 광해, 그 '뻔한 것'의 힘

입력
2012.10.16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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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이야기다. 추창민 감독도 "너무 쉽고 뻔한 영화"라고 말했다. 시대와 배경만 다를 뿐, 플롯과 인물설정, 극의 전개는 한날 한시에 태어나 생김새까지 같은 마크 트웨인의 와 좀도둑이 가짜 영주 역할을 하는 일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다. 에서는 왕이 암살 위협에 시달리다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천민인 광대 하선이 그의 역할을 대신한다.

동서양, 시대를 막론하고 이런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역할이 극단적이다. 가장 낮은 자가 가장 높은 곳에 오른다. 왕과 거지, 임금과 광대, 영주와 도둑. 그만큼 대리만족이나 카타르시스도 크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내가 어느 날 왕이 된다면"하는 꿈을 꾼다. 배우가 되고 싶은 것도, 연기의 매력도 허구일망정 지금의 '나'와는 정반대나 내가 갈 수 없는 인생을 잠시 살아보고 싶은 욕망 때문일 것이다.

영주인 형의 죽음을 숨기려는 동생이 카게무샤로 좀도둑을 데려왔듯이, 하선 역시 조정의 반란을 막기 위해 도승지가 선택한 인물이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닮은 꼴인 그들에게 옷만 바꿔 입혀놓고는 진짜보다 더 진짜같이 보여 모두가 속아주기를 바란다. 탄로가 나면 단순히 대역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가짜는 물론 그를 내세운 사람도 죽음을 면치 못한다. 공동운명체이다. 반대로 가짜가 자신을 위치를 망각해도 큰일이다. 위험천만한 도박이다.

재미있고, 아슬아슬하고, 비장한 상황이고 운명이다. 낯선 환경에서 가짜의 어이없는 실수들이 웃음을 준다. 그러나 그 조마조마한 웃음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가짜가 진짜로 착각하면서 하선이 "거참, 나랏일이라"고 한 농담이 현실이 되면서 끝난다. 하선이 왕의 신분으로 대동법 시행을 명하고, 양반과 관리의 횡포를 꾸짖고, 가난한 백성에게 선정을 베푼다. 헤어진 어머니를 만나려는 어린 궁녀 사월이의 소원도 들어주고, 역모죄를 뒤집어 쓴 오라비를 방면해 중전의 잃어버린 웃음도 되찾아준다. 가짜 왕의 반란은 누구보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의 아픔을 먼저 들여다보고,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아끼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백성은 그런 왕에게 놀란다. 백성만이 아니다. 가짜인 줄 아는 도승지도, 호위무사도, 중전도 감동한다.

는 사극의 옷을 입었지만,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허구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사라진 광해군 15일간의 행적에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편 것이다. 그것을 통해 영화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참된 지도자의 덕목이다. 학식도, 명석한 두뇌도 아니다. 가짜 왕 거지, 가짜 영주 카게무샤, 가짜 광해 하선이 가진 것은 진심으로 국민과 소통하고, 아픔을 함께 나눌 줄 아는 눈과 마음이다. 이 역시 뻔한 소리다.

이렇게 뻔한 영화에 1,000만 가까운 관객이 빠져들고 있다. 1인2역의 멋진 연기로 웃음과 감동을 뿜어낸 이병헌의 역할이 크지만, '뻔한 것'의 힘이다. 문화예술에서 말하는'뻔하다'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내용이 협소하고 낡고 몰개성적인 일반성으로 포장한 '상투'이고, 하나는 현실의 구체성으로부터 보편적인 인간경험을 찾아내 그것을 개성적이고 독특한 문화적 특성으로 표현한 '원형'이다. 어설프게 베낀 상투는 유치하지만, 원형은 우리에게 인간성을 발견하게 해준다. 뻔하지만 변할 수 없는 인간의 소중한 가치인 정의, 용기, 사랑, 가족, 우정, 나눔과 배려, 연민과 용서, 공동체의식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도 그렇다. 다만 섬세하고 개성적인 역사적 상상력과 표현으로 인간성을 감동적으로 담았기에 원형에 도달할 수 있었다. 위대한 지도자도 별것 아니다. 우리가 뻔하다고 여기는 가치들을 소중히 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세상을 감동시키기 때문이다. 대선 후보들 모두 이 영화에서 1,000만의 마음을 울린 '뻔한 것'의 힘과 가치를 확인했으면 좋겠다. 문화의 본질과 힘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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