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쩐지 예전처럼 가슴이 뛰지는 않았고 어쩌다가 꾸는 그이의 꿈이 그렇듯이 쓸쓸한 느낌만이 천천히 밀려올 뿐이었다. 이제 추석을 쇠었으니 강경 대목장은 지나갔지만 연이어 군산서 들어오는 어염 파시가 시작될 무렵이라 나들이 가기에는 그야말로 애매한 철이었다. 파시 지나려면 예년처럼 시월이 지나야 하는데 시댁에 찾아왔다는 손님이 어디 사나흘이면 몰라도 수십 일을 묵을 리가 없었고, 오죽하면 시누이가 방자를 사서 급주까지 띄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안 서방에게 사정을 이야기했고 그이는 펄쩍 뛰며 내일이라도 길 떠날 작정을 하시라고 내 등을 떠밀었다. 이튿날 장쇠를 데리고 부랴부랴 길을 떠났고 사흘 걸려 보은에 도착했다.
제생약방에 이르니 덕이가 반기며 우리를 맞았다. 나는 언제나처럼 안채 뒷방에 들었는데 헛기침 소리가 나더니 송 의원이 패랭이 쓴 남자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나는 시누이와 함께 있다가 그들을 맞았다. 서로 인사하고 송 의원이 나를 이신통의 부인이라고 소개했으며 손님은 다시 머리를 조아려 정중하게 내게 인사했다.
저는 유사 어른을 모시던 김돌몽이라고 합니다.
그이가 지난 몇 해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셨는지요?
내가 물으니 송 의원이 대신 말했다.
처남께서 호서 활빈당의 유사 노릇을 했다는군요.
지금 그분이 어디 계신데요?
내가 송 의원과 김돌몽을 번갈아 살피며 물었더니 두 사람 다 잠자코 앉았더니 김돌몽이 말했다.
저희 부대는 단양 근처에서 관군의 급습을 당하여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평소에 고향이 보은이라 하시고 제생약방 말씀을 하셔서 저는 이곳에 오신 줄 알았지요.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대번에 맥이 풀려버렸다.
어디 다치거나 총에 맞거나 하신 건 아니지요?
밤중에 경황 중이라 숲 속 산비탈을 뒹굴며 내려와서 다른 사람들이 어찌 되었는지 모르지요. 저희 부류는 경상 전라 충청 삼도에 널리 퍼져서 서로 연줄을 맺고 있는데 지도자인 행수유사를 맹감역이라 부릅니다. 그분의 성함이 이신이라는 것은 이 댁에 와서야 알았지요.
내가 한숨을 내쉬고는 무릎을 세워 이마를 짚고 앉았으니 송 의원이 곁눈질하여 사내를 데리고 나갔고 시누이가 내게 말했다.
저 사람이 두 해 동안이나 활빈당을 따라다녔답니다. 이번에는 오라버니의 행적을 뚜렷하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이제는 이신통이 내 앞에 직접 나타나 겸상하여 밥이라도 함께 먹지 않는 한 말로만 들어서는 아무런 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송 의원이 다시 들어오더니 내게 말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 사람들은 화적당처럼 산채를 두고 모여 살지는 않는 것 같습디다. 이들은 소백산 부근에 몇 무리씩 마을을 이루어 살았고 유사니 맹감역이니 하는 두령도 민가에 내려가 살았답니다. 처남이 유사요 맹감역을 맡았다니 거처가 어딘가에 있을 게 아니냐, 물었더니 자기도 잘 모르지만 아마도 영월 덕포가 맞을 거라고 합디다.
나는 다시 끊긴 길 위에 망연히 서 있는 듯하여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거긴 또 어딘가요?
남한강의 원천이라고 하는 데요.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처남을 찾아가보려 합니다. 어떻게든 찾아서 데리고 와야겠습니다.
그 먼 길을 어찌 가시렵니까?
단양까지 가서 소금배를 타고 오른다지요. 그러니 아주머니는 여기 계십시오.
활빈당에 들었다던 사내는 내포 지방이 고향이라면서 이튿날 노자를 얻어 가지고 떠나갔다. 나는 보은 시댁에 남아 있었고 송 의원이 장쇠와 약방 조수인 젊은이를 데리고 단양으로 출발하였다. 열흘 만에 송 의원은 집으로 돌아왔는데 시누이와 내가 물었더니 돌아앉아 곰방대만 퍽퍽 피우던 그가 짧게 한마디 했다.
처남은 돌아가셨어요.
나는 멍하니 앉았고 시누이가 다시 그에게 물었다.
아니 밑두 끝두 없이 그게 무슨 소리요?
총에 맞아 간신히 거처에까진 왔다는데 며칠 못 가서 죽었다는 게요. 내가 그 묻힌 자리까지 보고 왔구먼.
그는 지난 두 해 동안 영월 덕포의 뗏사공 집에 방을 빌려 살았는데 사공이 직접 묻었노라고 하면서 산소 자리까지 데리고 가서 보여주었다고 했다. 송 의원은 제물을 장만하여 가서 조촐하게 제도 올리고 왔다는 거였다. 나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웬일인지 오히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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