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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대필사건은 '검찰공화국' 신호탄 … 암투병 강기훈씨의 억울함 빨리 풀어줘야"

입력
2012.10.14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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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에만 인권 음악회 4개

유서대필사건 재심 촉구 콘서트… 군부독재 상기하는 남산 콘서트… 쌍용차·장기투쟁 노동자 지원 등

문학청년에서 인권운동가로

운동권 동생 죽음 후 유가협 활동… 의문사 다루면서 인권문제 눈떠… 외국의 독자적 인권운동에 충격

'反시장' 옮겨가는 인권운동

1980년대 신장되던 노동권… 외환위기 이후로 두들겨맞아… 신자유주의 도입후 약자 생존권↓

생명평화대행진 준비 중

쌍용·강정·용산 등 국가폭력사건… 행진·토론 통해 민의 확인·정리… 대선 후보들에 약자 대책 압박

약자들의 생존권을 지키려는 싸움의 뒤에 시민들의 지원이 늘어나고 있다. 해고에 맞서 장기투쟁하는 이들을 위해 시민들은 모금을 하기도 하고 바자회나 음악회, 밥차를 열기도 한다. 명망가들이 나서서 책을 써서 지원금을 보태기도 한다. 시민들의 이런 자원활동의 배후인물로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가 있다. 현장과 시민단체, 명사들을 엮어주는 박래군(51) 인권재단사람 상임이사.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를 위해 공지영씨는 를 써서 수익금을 기부하고 200여명의 명사들이 '함께 살자 희망지킴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상시지원하는 구상이 모두 그에게서 나왔다. 91년 김기설 당시 전민련 사회부장이 노태우 정권에 항의하며 분신자살하자 검찰은 운동권이 유서를 대필하고 의도적으로 자살을 유도했다는 의혹을 붙여 '유서대필사건'을 벌였는데 그 피해자 강기훈씨가 올봄에 간암판정을 받자 그를 돕는 일에도 그는 적극 나서고 있다.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 집행위원장, 국가보안법폐지 국민연대 집행위원장이고 유서대필사건 재심촉구 국민연대 집행위원장인 그를 만났다. 그는 또 5일 제주도 강정을 출발해서 11월 3일 서울광장에 도착하는 2012생명평화대행진을 준비하느라 무척 바빴다.

_최근에 음악회를 네 개나 조직했다고요.

"9일에 강기훈씨 쾌유와 재심개시 결정 촉구를 위한 후원콘서트를 서울시립대에서 했고 17일 저녁에는 대한문 앞에서 공지영씨 책 판매수익금을 전달하는 2차 북콘서트가 열려요. 24일은 인권재단사람이 인권센터 건립을 위한 '남산, 사람을 만나다' 콘서트가 남산의 안기부터에서 열려요. 26일에는 다시 대한문에서 쌍용자동차 뿐만 아니라 장기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밥 콘서트를 해요.".

_강기훈씨와는 원래 잘 아는 사이인가요?

"91년에 유서대필 사건이 터졌을 때 강기훈씨는 전민련 활동가고 저는 유가협 사무국장이었어요. 4월에 강경대 군부터 시작해서 학생들의 희생이 이어졌기 때문에 저는 죽음의 현장을 계속 쫓아다닐 수 밖에 없었어요. 그때 제 별명이 '재야의 장의사'였어요. 강기훈씨는 6월 23일인가 자진출두를 해서 곧바로 감옥에 갔어요. 제가 94년 8월부터 인권운동사랑방 멤버가 됐는데 이곳에서 강기훈 무죄석방 공동대책위를 만들어서 3,000쪽자리 유서대필 총자료집을 만들었어요. 2000년대에는 (창립주축인) 서준식 선배도 인권운동사랑방을 떠나고 제가 책임지고 끌어오면서 진실화해위원회의 재심권고를 끌어냈어요. 그런데 이게 2007년 11월이니 너무 늦게 났지요. 2008년에야 재심개시 소송을 해서 서울고등법원에서 2009년 재심개시결정이 난 거에요. 검찰은 과거사 관련해서 진실화해위에서 재심권고하는 사건들은 항고를 안했는데 이건 항고를 했어요. 그리고는 대법원에서 3년째 묶여 있어요. 우리나라를 검찰공화국이라고 하는데 검찰공화국이 시작되는 시점이 유서대필사건이거든요. 이전에는 공안기관대책회의 하면 안기부가 주도해서 역할을 나눠줬어요. 그런데 이 사건은 이례적으로 검찰이 주도했어요. 이 사건이 잘못됐다고 하면 검찰의 존립근거가 흔들리는 거거든요. 그런 중에 올봄에 강기훈씨가 간암 판정을 받았어요. 수술로 간을 잘라냈는데 문제는 간으로 가는 정맥이 자꾸 터진대요. 현재는 몸상태가 안 좋아서 본격적인 항암치료를 못하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한시바삐 억울함을 풀어줬으면 좋겠어요."

_남산 콘서트는 왜 하는 거예요?

"남산이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의 심장부였어요. 박정희는 5.16쿠데타 일으키고 곧바로 6월 10일 중앙정보부법을 만들어요. 남산 유스호스텔 옆에, 지금은 헐린 제1별관터에 군대 퀀셋 막사 두 개를 세워놓고 시작을 했어요. 여기서 민주화 인사는 물론 정적들 고문까지 하지요. '풍년사업'이라고 해서 유신헌법 초안도 거기서 만들었어요. 남산에는 당시 40채 이상의 안기부 건물이 있었다는데 지금도 유스호스텔 교통방송 대한적십자사로 쓰이는 건물 등 10채 정도가 남아있어요. 저희들 구상은 이런 남산을 '인권평화의 숲'으로 만들려고 해요. 반인권적인 공간을 민주주의와 인권과 평화의 가치를 배우는 곳으로 만들자는 거지요. 올봄에 이어 두번째인데 30대 이하는 안기부가 뭐하던 데인지도 모르거든요."

_쌍용자동차 희망지킴이는 뭐예요?

"쌍용자동차는 해고노동자 2646명과 그 가족 가운데 22번째 분이 3월말에 돌아가셨거든요. 이 죽음의 행진을 막자, 비슷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응원하는 응원부대를 만들어보자, 그래서 소셜테이너를 비롯한 법조인 종교인 등등해서 230명에게 연락을 해서 회원을 받았어요. 쌍용차가 상하이차로 넘어갈 때부터 먹튀자본이라는 게 예측이 됐거든요. 노동자들이 임금삭감하고 출자할 테니 국가가 인수해달라 했는데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상하이차가 있었는데 약속한 투자는 전혀 안했어요. 2008년 자산평가를 할 때는 부채도 별로 안되고 자동차노동자는 우수한 인력이라고 평가하더니 1년 후에 몇 십배 많은 부채 비율로 자산평가를 하면서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해고 밖에 없다, 이런 결론이 났어요. 우리나라 3대 회계법인이 이런 회계조작에 다 참여해요. 이게 청문회서 드러났지만 여전히 노동자들에게 복직할 길은 열리지 않고 정말 갑갑해요. 쌍용 출신이라는 블랙리스트에 걸려서 다른 데 취업조차 안되거든요."

_연세대 국문과 81학번이지요?

"원래는 소설가가 꿈이었어요. 그 해에 '땅강아지'라는 단편소설로 연세문학상도 받았고요. 날짜도 안 잊어먹는데 그 해 11월 25일에 학내 시위가 일어났는데 학생회관 4층에 있던 2학년 선배를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바닥으로 떨어졌어요. 그때 지켜보기만 한 자책감으로 문학도 버리고 운동권에 들어가 매일 시위 주도하는 일만 했어요. 83년에 4.19데모 여파로 강제징집을 당해서 양구의 철책선 안에서 군복무를 했어요. 제대를 하고는 부평의 공단에 가서 노동운동을 했어요. 감옥 갔다 오니까 몸이 너무 망가져서 운동을 할 수 없었어요. 아버지가 졸업만 해다오 그래서 88년에 복학을 했는데 동생(박래전 88년 분신사망)이 그렇게 된 거에요. 동생은 당시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이었는데 비공개수배 상태로 학생회관에서 숙식을 하다가… 아버지와 형님한테 원망 많이 들었지요. 그때부터 유가협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의문사 진상규명하고 온갖 학생 노동자 사망 사건 처리하러 다녔어요."

_그런데 어떻게 인권운동을 하게 됐어요?

"유가협에서 의문사를 다루면서 이게 과거의 정치활동과는 다르구나 하는 걸 깨달았고요. 1993년에 유엔에서 개최한 비엔나세계인권대회에 의문사를 알리러 갔다가 별별 문제들이 다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가 되는 걸 보았어요. 성소수자들 퍼포먼스에 문화적 충격도 엄청 받았지요. 인권을 독자적인 운동으로 해갈 수 있겠구나 그래서 서준식선배가 만든 인권운동사랑방에 이듬해부터 동참하게 되지요. 인권운동을 해보니 활동가들도 부족하고 이들을 지원하는 활동도 없는 게 안타까워서 인권운동활동가를 지원하는 인권재단사람을 2004년에 만든 거지요. 작년말까지 시민 모금으로 6억 정도를 모아서 작은 집을 샀어요. 더 모금해서 100평 정도의 인권센터를 지을 생각입니다."

_한국에서 인권문제는 반독재라는 거대담론에서 성소수자 병역거부 다문화 같은 생활 속의 주제로 옮겨갔다가 반시장이라는 거대담론으로 다시 옮겨가고 있지요.

"인권운동은 반독재투쟁 속에서 커왔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인권 이야기를 하기가 참 힘들었어요. 재소자인권을 처음 제기할 때 재소자들도 '양심수 아닌데 우리 인권문제도 다뤄주나요?' 그랬어요. 그 간극을 깨는데 한 10년 걸렸어요. 사회복지시설 같은 데도 인권침해 엄청나게 일어나는 걸 폭로해서 에바다재단은 7년을 싸워서 비리재단을 몰아냈지요. 최하층 열악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권한에 관한 문제인데 이들의 경제사회문화적 권리, 사회권이라는 게 인권이라고 생각을 안해요. IMF 터지니까 그제서야 받아들이더라고요. 쫓겨나고 노숙자 많이 생겨나고 열악한 상황이 되니까 사회권을 우리가 살아야 할 당연한 권리로 이해하게 되더군요. 예전에는 국가권력만을 보다가 시장권력을 같이 볼 수 밖에 없어요. 국가권력이 불의한 시장권력을 제재해야 하는데 오히려 자웅동체처럼 편들어주면서 인권침해를 하니까요."

_그래도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인권은 향상된 거 아닌가요?

"김대중 정부는 국가보안법 체계안에서 생겨난 장기수를 석방하고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어 정치적인 자유권은 많이 신장시켰어요. 사회복지 많이 했다지만 사회에서 밀려난 이들이 근근히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복지이지 건전한 복지국가는 아니었거든요. 노무현 정부도 탈권위를 지향하면서 자유권의 신장은 많이 됐는데 농민 노동자 민중들의 생존권 투쟁에 대해서는 잔인하게 짓밟았어요. 평택에 미군기지를 만든다면서 그곳을 간척한 농민들을 강제이주 시켰고 가짜 주민총회를 만들어서 강정 해군기지안을 만든 것도 노무현 정부거든요. 두 정부 다 자본의 缺痼?극대화하는 신자유주의를 도입하면서 빈부격차는 더 심화되고 자살자도 늘어났어요. 그 토대를 이명박 정부가 올라탄 거고요. 상시적인 정리해고가 가능하게 만들었고 비정규직이 많아졌고 경제적인 불평등이 심화되고. 불안정한 일자리에 소득도 떨어지고 노동하면서 얻을 수 있는 자긍심이 사라지고 쫓겨난 사람들은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 찍히고 그런 걸 수치심으로 생각하고 자살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너무 끔찍한 착취가 이뤄져서 더 이상 재생산이 일어날 수 없는 야만적인 상태로 갔기 때문에 이건 막아야 한다고 근대적인 노동법이 나온 거예요. 우리나라는 1980년대 신장되던 노동권이 IMF를 맞으면서 두들겨 맞는.꼴이 되었어요."

_그래서 민회를 여는 건가요? 인권운동과는 무슨 상관이에요?

"인권운동의 목표가 모두가 권리의 주체가 되는 거거든요. 모두가 권리의 주체가 되려면 민주주의하고 연결될 수 밖에 없고요. 서로를 존중하면서 합의점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민회를 통해 경험하는 거지요. '노동자가 하늘이다, 구럼비가 하늘이다, 쫓겨나는 자가 하늘이다 ' 이런 구호로 6월에 스카이액트라고 시작을 했어요. 쌍용의 S, 강정마을의 K, 용산의 Y, 이게 다 이명박 정부 들어 국가폭력에 희생된 대표적 케이스잖아요. 생명평화대행진이라고 5일 제주도에서 시작해서 11월 3일 서울광장에 들어오는 일정이고요. 그 사이에 두 번의 민회를 해요. 20일 지리산 실상사 민회를 하고 28일은 평택 쌍용자동차 앞에서 민회를 해요. 행진을 통해서 민의를 확인하고 토론을 통해서 우리가 바꿔야 할 것이 뭔가,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뭔가를 정리해서 선언문을 만들고요. 이 선언문을 실천하기 위해서 행동계획도 만들고요, 지금 노동자 농민들의 절실한 요구를 대변해줄 정당이 없잖아요. 우리가 대통령이 될 수는 없으니까 생명평화대행진으로.후보들을 압박할 수 밖에 없어요. 가장 약한 자들을 위한 대책을 내놓으라고."

서화숙선임기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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