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라디오로 매일 접한 작곡가 쇼스타코비치(1906~1975)를 1971년에 직접 만날 수 있었죠. 격정적인 음악과 달리 그는 소심하고 수줍음 많은 사람이었어요."
작곡 의도를 어떻게 읽어 내느냐에 따라 작품 해석이 완전히 달라지는 클래식 음악계에서 작곡가와 직접 친교를 맺은 지휘자의 존재는 귀하다. 러시아 지휘자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80)는 1930년 옛 소련 국영방송 산하 관현악단으로 창단된 82년 역사의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에서 38년 간 음악감독 겸 수석지휘자로 일해 왔다. 음악과 함께 한 세월의 더께만큼 다양한 러시아 음악가들과의 친분을 자랑하는 그는 지역색이 옅어지는 세계 관현악 시장에서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이 여전히 호방하고 묵직한 러시아적 색채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2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자신의 악단을 이끌고 6년 만에 네 번째 내한공연을 갖는 그를 미리 인터뷰했다. 일본 순회공연 첫날인 13일 도쿄에서 한 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에서 만난 그는 팔순의 나이가 믿기지 않게 음악적 열정이 넘쳤다. 쇼스타코비치와의 인연을 이야기할 때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기도 했다. "어려서 이해하지 못했던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지금은 사랑하게 됐죠. 한국에서 연주할 교향곡 10번은 어렵고 철학적인, 그의 모든 삶을 보여 주는 음악입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엔지니어인 아버지에게 아코디언으로 민속음악을 배우며 음악을 접한 그는 1954년 모스크바로 이주한 후에야 그네신 국립음악원에 정식 입학했다.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보낸 어린 시절 라디오로 듣던 쇼스타코비치 음악은 그에게 삶의 희망이자 음악 선생님이었던 셈이다.
소비에트 연방 해체 후 정부 지원이 끊기면서 유수의 러시아 음악가들이 재정난을 견디지 못해 서방으로 이주했지만 그는 여전히 모스크바에 적을 두고 있다. 그에게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은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통하는 "가족이자 형제, 자식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소비에트 연방 붕괴 직전 혼란스러워하는 단원들을 달래 쇼스타코비치의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를 녹음한 상황을 예로 들며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손과 눈으로 나와 통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과의 특별한 인연도 소개했다. 1997년 피아니스트 백건우씨와 협연 음반을 녹음했다. "그를 잘 몰랐지만 그때 그의 연주에 반해 이후 몇 차례 공연도 함께 했다"고 한다. 가장 최근이었던 2006년의 방한도 잊지 못한다. "한국, 일본 등 아시아 관객은 비애의 러시아 정서와 맞닿아 있어 반응이 유독 뜨거워요. 2006년 한국 공연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새로운 인연을 만들 이번 무대도 설렌다. 공연 프로그램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과 더불어 2010년 인디애나폴리스 국제 콩쿠르 우승자이자 한창 주가를 높이고 있는 클라라 주미 강씨가 협연하는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구성됐다.
이날 페도세예프가 가마쿠라 예술관에서 열린 공연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과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의 지휘를 마치자 객석에는 저음부가 도드라졌던 연주만큼이나 무게감 있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앙코르곡까지 끝낸 노년의 거장은 가벼운 몸짓으로 단상 위에 팔짝 뛰어올라 관객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삶의 연륜이 빚어낸 담백한 연주의 잔향이 귓가에 오래 머물렀다.
가마쿠라(일본)=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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