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로 작가를, 그리고 소설을 판단해 보자.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 대중에겐 낯설고 마니아들에겐 마치 복음서에 박혀 있는 것처럼 추앙의 대상이 되는 이름이다. 1948년생이니 올해 예순 넷. 여전히 장편, 단편, 논픽션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써내고 있는 현역 작가다. 여하튼, 유튜브를 통해 본 그의 얼굴과 말본새는 영국의 개성파 배우 빌리 나이와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를 반반씩 섞어놓은 것 같다. '독창+편집증+혁신+안하무인+메시아+그로테스크+서브컬처'한 인상. 읽어보니 소설의 분위기가 딱 그렇다. 책 고를 때 가끔은 저자의 외모를 판단 기준으로 삼아도 될 듯.
줄거리는 이렇다. 마약, 섹스, 컴퓨터 사이언스가 지배하는 근미래. 일류 해커를 꿈꾸는 바비는 소프트웨어를 잘못 썼다가 목숨을 위협받게 된다. 무자비한 공격을 받고 떠돌던 중, 사이버스페이스의 신을 믿는 이들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그리고 점점 자신을 둘러싼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게 된다. 사고 뒤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용병 터너는 신기술을 빼내오는 임무를 맡는다. 하지만 그 임무에 다른 배경이 있음을 깨닫는다. 화랑을 운영하는 말리는 뜻하지 않게 가짜 작품을 취급했다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세계적인 재력가로부터 놀라운 제안을 받게 된다. 소설은 이 세 명의 이야기를 톱니처럼 맞물려 돌리며 인류의 '내일'을 기록한다.
긴박하게 전개되는 스토리의 배경으로 여러 대륙의 지명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스토리의 무대를 굳이 하나로 꼽자면 그건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다. 지금은 어린이들도 이해하는 개념이지만 이 책이 발표된 1980년대, 전기 신호와 컴퓨터 프로토콜만으로 존재하는 또 다른 세상은 무척 낯선 것이었다. 16비트 386PC가 막 보급되던 시절에 저자는 현재의 월드와이드웹(WWW)을 넘어서는 네트워크를 구상하고 거기 시크한 누아르 장르의 옷을 입혔던 것. 사실 사이버스페이스라는 용어 자체가 윌리엄 깁슨에 의해 창안된 것이기도 하다. 비행접시를 타고 날아온 외계인과 각개전투를 벌이는 백악관의 히어로쯤으로 SF장르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면, 이 책을 통해 SF의 격조를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1986년 발표됐고 전작 (1984), 후속작 (1988)와 함께 사이버스페이스 3부작을 이루는 작품이다. 저자는 인류가 보유한 모든 경험과 지식, 그리고 감정마저 시공을 초월한 네트워크 속에서 빛의 속도로 날아다니는 세상을 일찍 예견했고, 그것이 지닌 디스토피아적 속성을 시리즈의 주제로 삼았다. 는 3대 SF 문학상으로 꼽히는 휴고상, 네뷸러상, 필립 K. 딕 상을 사상 최초로 모두 휩쓸며 7,000만부라는 경이로운 숫자로 팔려나갔다. 이 시리즈에 담긴 그의 상상력은 이후 오시이 마모루의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1995), 워쇼스키 남매의 영화 '매트릭스'(1999) 등 숱한 명작의 모태가 됐다. 말하자면 사이버스페이스로 표상되는 인류의 음울한 미래의 원형질인 셈.
소설을 맛나게 읽는 팁 하나. 책 속에선 일본의 이미지가 여러 형태로 등장한다. 주인공이 닌자처럼 묘사되고 등장인물이 일본항공(JAL)을 타고 세계 여러 곳으로 이동하는 것 등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본에 대한 호감과 혐오가 묘하게 뒤섞여 있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나온 리들리 스콧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에서 감지되는 태도와 흡사하다. 1980년대, 머잖아 세계를 지배할 것 같았던 일본에 대한 미국인의 복잡한 심리를 읽을 수 있다. 팁 둘. 최근 어떤 대선주자가 출마선언을 하면서 인용한 윌리엄 깁슨의 "미래는…" 어쩌고 하는 말은 잊어버릴 것. 그 선언의 뉘앙스는 소설의 맥락과는 상반돼 독서에 방해만 될 뿐이다. 깁슨이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대해 얘기하는 동영상이 오히려 흥미롭다. 유튜브를 검색해보면 찾을 수 있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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