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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에세이] 한 번쯤은 슬픈 추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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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에세이] 한 번쯤은 슬픈 추석을

입력
2012.09.21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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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시인 이상(李箱)이 쓴, 누가복음을 탐독했다는 수필 <산촌유정> 은 지금껏 충격으로 남는다. 미국 워싱턴에 사는 시인 김명희가 메일링 해, 이 난(欄)에도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한국일보 8월 25일자 '토요에세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수필이다. 그 김명희가 이번에는 시 한 편을 보내왔다.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20리를 걸어 열 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막내딸 이뿐이는 대추를 안준다고 울었다/절편 같은 반달이 싸릿문 위에 돋고/…고개 넘어 가까워지면/이뿐이 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시인 노천명의 시 <장날> 이다. 나름의 시평(詩評)도 함께 딸려있다.

"노천명 시인의 시를 읽으면 언제나 슬퍼지지만 그분의 시가 유독 슬퍼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그분의 시에는 이상한 매력이 있지요. 거기에는 슬픔이 있고 고고함이 있고 담대함이 있고 우리의 옛 풍습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아늑한 행복이 있습니다. 이러한 아늑한 행복을 감지하게 될 때에 우리는 멀고 먼 잃어버린 고향을 회상 하는 듯 슬퍼지는 것입니다."

나도 곧바로 답신을 보냈다.

"어이, DC의 김명희, 시인은 역시 다르다. 시인이 보내는 한가위선물로 시 이상이 무에 있으랴. 시면 다 같은 시던가. 시인이면 다 같은 시인이던가. 노천명의 시, 그 것도 '추석'이 시어(詩語)로 등장하는 '장날' 빼고 어느 시로 감히 추석을 논하랴! '장날'이 슬픈 시라서 더 좋다. 대추와 밤을 가지고 열하루 장보러 떠나는 새벽 '내 딸 이뿐이는 대추를 안준다고 울었다'는 애비의 절규가 특히 가슴을 친다. 아이를 울리면서까지 대추를 다 가져다 팔아야 했던 가난한 아버지의 현실! 추석하면 으레 풍요롭고 느긋함의 대명사가 돼 있네만, '장날' 속의 보채는 딸 이쁜이로 그 추석이 더욱 추석다워지니 놀랍다. 노천명이 '장날' 속에 감춰뒀듯, 그렇다, 추석은 우리에게 아직껏 슬픈 명절로 와 닿는다.

추석 전날 나는 콩을 팔았다. 이쁜이 애비가 '대추 밤을 돈사서 추석을 차렸듯', 그 해 나는 콩을 팔아 추석을 도왔다. 학교를 조퇴, 완산교 다리 위에 나와 콩을 팔았다. 변두리 밭에서 주인 몰래 따온 콩 다발이다. 옆에서 함께 콩을 팔던 누나 경자가 '어? 승웅아, 느네 담임선생 오신다!'더니 그대로 도망쳐 버렸다.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고개도 숙이지 않았다. 내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시던 여자 담임 김정남 선생님, 한참을 묵묵히 서계시더니 물었다. '그거 전부 얼마냐?' '40환인데요'

그날 나는 담임께 기어코 콩을 팔았다. 콩 다발을 들고 가시려는 담임선생님께 속으로 '그럴 수는 없다' 생각 들어 콩 다발을 안고 선생님 댁까지 들어다 드렸다. 80환을 주셨다. 그 돈으로 추석을 치렀다. 추석 날 아침, 밥상모퉁이에 앉아있던 경자가 어제 일을 어머니에게 다 일러바쳤다. 어머니가 우셨다. 아버지랑 형은 가만히 듣고 계셨고, 나도 울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울고 있다. 전주완산초등학교 3학년 때 이야기다. 정말이다 김명희, 추석은 아직껏 내겐 슬픈 명절이다.

시 '장날'로 다시 돌아가자. 시의 첫 스탠자(stanza)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에 나오는 '돈사야'라는 단어에는 설명이 좀 필요할 듯해서다. '내다 팔아 돈을 만들어야'라는 뜻의 황해도 사투리로, 그곳을 고향에 둔 노천명이 어린 시절을 말하기 위해 작심하고 차용한 사투리 같다.

시 속의 이쁜이는 자라 시인이 된 것이다. 슬픈 시인이 된 것이다. 시인이 훗날 사슴더러 '목이 길어서 슬픈 짐승'으로 읊은 것도 예의 슬픔 때문일 것이다. '천명(天命)'이라는 이름 자체도 단명의 뜻이 담겨 슬프고… 그 추석, 이제 정확히 일주일 남았다. 한 번 쯤 슬픈 추석을 맞아보시게. 본 뉘(bonne nuit)."

김승웅 전 한국일보 파리특파원ㆍswkim43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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