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의 자동차를 '슈라이어 전과 후'로 구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독일을 대표하는 자동차들인 아우디, 폴크스바겐의 디자인을 책임지다가 2006년 기아에 디자인총괄 부사장으로 스카우트 된 뒤 'K' 시리즈 등으로 피터 슈라이어(59)가 남긴 족적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자동차 디자이너로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슈라이어가 처음 산업디자인이 아닌 순수미술에 도전했다. 22일부터 11월2일까지 갤러리현대 서울 강남점에서 그동안 작업해온 드로잉, 회화, 조각 등 60여점을 모아 전시회를 연다.
슈라이어는 개막을 앞두고 19일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자동차 디자인에는 '이성'이 중심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디테일을 말로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본능이나 직관이 중요한 순수예술작업은 그런 점에서 자동차 디자인 작업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구매'에 포커스를 두는 자동차 디자인을 오랫동안 일로 해왔지만 이번에는 '나'의 감정, 기억 등을 내보이는 새로운 경험"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전시 제목이 '인사이드 아웃'이다. 그는 "개인전을 오래 전부터 열고 싶었지만 바빠서 기회를 만들지 못했는데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의 권유로 결실을 보게 됐다"고 말했다.
전시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전남 담양 소쇄원 방문 경험과 거기서 얻은 영감을 녹여낸 '레스트 박스' 등 동양적 정서가 담긴 일련의 작품들이다. 슈라이어는 "소쇄원의 벽, 바닥에 유럽에서 체스가 나오기 전에 유행했던 '나인 멘스 모리스'라는 보드게임 도판 같은 문양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동서의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고향인 독일 남부 바트 레이헨할 근처의 작은 공항에서 어릴 때부터 봐온 비행기에 대한 매혹과 실제로 세스나기를 조종했던 경험 등을 녹여낸 회화작품, 또 자신이 즐기는 썰매경주 '스켈레톤'의 썰매 등을 활용한 설치 작품도 있다. 그 밖에도 어린 시절 그의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공구 상자에 스켈레톤 경주 때 썼던 모자의 참가번호를 붙인 장식물, 네 살 때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동물원 모형을 그대로 전시했고, 자신이 좋아하는 재즈 연주자 마일스 데이비스의 그림도 몇 장 포함돼 있다.
슈라이어는 '자동차 그림이 눈에 안 띈다'는 질문에 "미술작업은 자동차 디자인이라는 일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차원인데 자동차 그림을 그린다면 일의 연장이 돼버려 되도록 안 그렸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이번 전시에 '자동차'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딱 한 점 있다. 무슨 차일까. 기아차? 아니다. 그가 디자인총괄책임을 맡아 2000년 유럽 오토쇼들에 선보였던, 컨셉트카로만 존재한 스포츠카 '아우디 로제마이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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