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사변은 1931년 9월 18일 시작된 일본 관동군의 만주 침략전쟁을 말한다. 러일전쟁 승리로 남만주철도 조차권(租借權)과 철도 연변 행정권을 획득한 관동군은 만주 장악을 노리고 사건을 꾸민다. 봉천(奉天) 외곽 류타오거우(柳條溝)의 만철(滿鐵) 선로를 폭파한 뒤 만주군벌 장쉐량(張學良) 쪽의 소행이라고 트집 잡아 9월 19일 군사행동을 개시, 5개월 만에 만주 전역을 점령하고 괴뢰국가 만주국을 세웠다.
■ 류타오거우 사건의 진상은 줄곧 논란이 됐다. 2006년 일본 요미우리(讀賣)신문은 오랜 탐사보도를 통해 관동군의 공작을 입증했다. 당시 관동군은 만주 침략계획을 작성, 대본영의 승인을 받았다. 다만 중국 쪽이 도발하면 실행한다는 조건이었다. 일본 정부는 관동군 강경 소장파가 무모한 전쟁을 벌일 것을 우려했다. 이 때문에 관동군은 류타오거우 사건을 꾸민 것으로 확인됐다. 역사학자들은 군부의 침략주의와 문민 정치세력의 무능이 동북아시아에 불행한 사변을 낳았다고 결론지었다.
■ 댜오위다오(釣魚島), 센가쿠(尖閣) 열도를 둘러싼 중일의 영유권 분쟁이 무력 대치로 치닫고 있다. 중국어선 1,000여척이 해상 시위를 위해 몰려드는 가운데, 중국 해양감시선 12척과 일본 순시선 8척이 주변 해역에서 맞서고 있다. 양쪽 모두 해경 임무를 수행하는 선박이어서 최대 무장이 40mm 포에 불과하지만, 일단 부딪치면 해군력이 가세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될 수 있다.
■ 댜오위다오 사태의 악화는 두 나라 정치세력의 이해와 민족주의 정서가 맞물린 결과다. 일본 정부는 경제 난국과 원전 논란 등에서 여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영토 분쟁을 이용하고 있다. 중국 지도부는 미국의 일본 방위 의지 등 아시아 전략을 시험하려는 의도와 함께 권력 교체기의 여러 문제를 덮기 위해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한다. 여기에 공교롭게도 만주사변 81주년이 겹쳤다. '댜오위다오 사변'을 막으려면 정치적 계산과 민족주의 정서에 억눌린 외교를 정상으로 되돌려야 한다.
강병태 논설고문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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