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 단일화는 대선 흐름을 바꾸려는 비장의 카드였다.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권은 분열돼 있었다. 65년 한일협정 반대투쟁에서 강경파였던 윤보선이 통합야당인 민중당을 나가 신한당을 세운 뒤 대선 후보로 나섰고, 기존 민중당에선 유진오가 후보가 되어 대립했다. 그냥 두면 박정희 대통령과 겨루는 대선은 필패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야권 전체가 나서 후보 단일화를 추진해 윤보선이 대선 후보가 되고, 유진오가 통합정당인 신민당의 당수를 맡는 합의가 이뤄졌다.
■ 1997년 대선 당시 김대중과 김종필의 'DJP 연합'은 골수 진보와 보수 원조 간의 '이종결합'이었다. 정치 성향의 현격한 차이로 합당 대신 대통령 후보 김대중, 초대 총리 김종필 하는 식의 공동정부 구성을 전제로 한 협력이었다. 집권 후 내각제 개헌을 통해 총리를 실세화 하고 경제부처 장관 임명권을 갖도록 하는 등의 합의가 있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과 정몽준의 후보단일화는 어찌 보면 DJP 연합보다 더 이질적이어서 '적과의 동침'에 가까웠다. 월드컵 열풍을 타고 욱일승천 하던 정몽준이 협상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했던 상황이 오히려 단일화 추진의 동력이 됐다. 사실상 정치적 담판에 의한 앞서의 두 단일화와 달리, TV토론과 여론조사를 거쳐 지지도가 높은 인물을 대선 후보로 하는 경쟁 방식이었다. 노무현이 극적인 역전에 성공해 단일화 후보로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와 맞붙었다.
■ 후보 단일화의 효과는 들쭉날쭉했다. 끝내 파벌갈등을 극복하지 못한 신민당의 윤보선 후보는 박정희 후보에게 무려 116만여표 차로 참패했다. 김대중은 김종필과의 제휴에 이어 박태준의 협력까지 얻음으로써 마침내 대권을 거머쥐는데 성공한다. 노무현은 선거 전날 정몽준의 후보 단일화 공조 파기가 오히려 승리에 도움이 됐다. 이렇게 보면, 후보 단일화의 산술이 반드시 '1+1=2'는 아니었던 셈이다. 문재인ㆍ안철수 간 후보 단일화 추진이 올해 대선의 향방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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