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가 꼭 석 달 남았다. 드디어 안철수의 출마 선언이 있을 것이라 한다. 명확치 않았던 선거구도의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그의 행보가 야권의 전열과 대선결과에 큰 영향을 줄 거라는 건 천하가 아는 사실이다. 새누리당의 공보위원이 가했다는 ‘협박’도 선거구도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려는 인수분해의 성격이 강했다. 그 해프닝 이후에도 여당은 안철수가 출마할 경우 본격적인 ‘검증’을 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소위 ‘친구’ 사이의 사적 압력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검증은 공적인 행위이므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논리다.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다. 검증은 선거운동의 한 부분 정도가 아니라 선거 자체가 후보들을 검증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유권자가 4,000만 명이 넘을 텐데 오늘부터 유권자 한 사람이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에 대해 각각 하루에 한 번씩만 생각한다고 가정해 보자. 도합 108억 번이 넘는 ‘검증’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천문학적 수준의 집단적 평가가 모여 일정한 흐름을 형성하고 향후 5년간 이 나라를 이끌 대표가 탄생한다. 아마 어떤 제품생산, 어떤 선정과정도 100억 번이 넘는 평가를 거치진 못할 것이다. 이게 민주주의의 힘이다. 그런데 후보의 평가와 제품의 평가는 전혀 다르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제품 평가는 무결점을 향한 완벽을 지향하지만, 대선 후보의 평가는 대통령직에 걸맞은 최적합성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권자는 후보의 결함조차도 합목적적으로 평가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공학적 평가와 정치적 평가의 차이다.
그런데 민주적으로 선출되었다고 해서 최적합한 사람이 언제나 선출되진 않는다는 데 우리의 고민이 있다. 결정적인 하자, 즉 다른 모든 장점을 덮을만한 큰 결함이 있는데도 유능하다는 이유만으로 뽑힌 사람도 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검증’이라는 과정 때문이다. 민주선거에서 검증은 꼭 필요한 일이지만 현재 정당들이 벌이는 검증은 대선은 고사하고 그 어떤 선거에서도 써선 안 될 정도로 저급하다. 신상털기는 기본이고 인신공격, 인격살해, 흑색선전을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자행한다. 그러면서 정당한 정치행위라고 강변한다. 한 술 더 떠 자기 입맛에 따라 진짜 중요한 결함을 서슴없이 두둔하기도 한다. 지난 번 대선이 저질 검증의 바닥을 보여줬다면 이번 대선은 그보다 더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검증의 검증’이 필요하다. 유권자와 시민단체, 특히 언론이 제대로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것이다.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점은 ‘검증’이란 말이 객관성을 결여한 맥락에서 사용되기 쉽다는 것이다. 자기 쪽에 유리한 정답을 미리 정해 놓고 상대방을 그 틀 안에서 잡겠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다. 우리나라에서 검증의 원조가 ‘사상 검증’에서 비롯되었던 것을 잊어선 안 된다. 따라서 어느 한 쪽의 일방적 세계관을 기준으로 검증 운운하는 소리는 철저하게 검증받아야 마땅하다. 또 있다. 상대방의 먼지를 털어 내 그 사람의 위선성을 폭로하겠다는 식으로 검증에 나서는 것도 문제다. 이런 차원의 문제가 제기되면 그것이 애초 검증거리가 되느냐 여부부터 판단해야 한다. 그런데도 언론은 사실여부를 가리자는 식으로 화답하곤 한다. 돋보기를 들고 나뭇잎을 검증하면서 숲을 놓치는 격이다.
대통령 선거에서 검증은 헌법정신인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잘 지킬 수 있는 기본 철학과 역사관을 가졌느냐의 여부가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민주-평화-번영에 대한 방향성을 따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큰 틀에서 검증해야 한다. 민주를 논하면서 인권에 대한 생각은 무엇인지, 평화를 논하면서 대북관계는 어떻게 풀지, 복지를 논하면서 증세를 어떻게 처리할지 등 아주 기본적이지만 중요한 방법론을 짚어야 한다. 검증의 검증도 통과하지 못하는 정당의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을 순 없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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