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열두 달을 국내는 물론, 파리와 뉴욕에서 나눠 지내는 코스모폴리탄이자 노마드적 삶을 사는 작가 김수자(55)씨. 12일에 만나 받은 그의 명함에는 각국의 연락처가 빽빽하게 적혀있었다. "아버지가 군인이어서 어릴 때 자주 이사를 다녔어요. 줄곧 보따리를 싸고 푸는 여정이었죠. 자전적 삶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아온 내 작업은 이제 삶 그 자체에요."
바늘과 보따리 작가로 유명한 김씨의 3년 만의 개인전 '투 브리드'(To Breathe)가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10월 11일까지 열리고 있다. '뭄바이: 빨래터' 등 최근 10여 년간의 근작과 2012년 신작 '실의 궤적' 등 영상작품 10여 점이 모인 대규모 전시다.
총 6부작으로 기획돼 현재도 진행 중인 '실의 궤적'연작 중 두 편은 이번 전시에 선보였다. 바느질, 레이스 짜기처럼 실이 사용되는 일상적 행위를 통해 세계 각 지역의 고유한 역사와 삶의 궤적을 좇는 이 프로젝트 1부에는 페루 쿠스코 주변의 성스러운 계곡과 마추피추, 타킬레 섬마을을, 2부에는 벨기에, 크로아티아 등의 유럽의 모습을 담았다.
바늘로 천을 꿰매듯 연출이 개입되며 직조된 영상은 시적이다. 페루에서 옷을 만들기 위해 실을 잣는 모습은 마치 춤을 추는 듯하고, 유럽에서 레이스 짤 때 들려오는 실패의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은은한 풍경 소리 같다. 각각 25분 남짓한 두 영상은 고요하게 마음에 스민다. 페루와 유럽에서 2, 3주간 시나리오나 어떤 연출 없이 즉흥적인 상황을 담아낸 영상에는 그간 바늘과 실, 보따리를 테마로 지역적 특성을 담아왔던 것처럼 인류학자적인 면모 또한 강하게 풍긴다.
"어릴 때부터 유랑해오면서 비교문화적인 시각이 잠재되어 있지 않았나 싶어요.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의 저서도 흥미롭게 읽었고요. 인간 삶의 관계성과 지역의 특색을 작품에 담고 싶습니다."
보따리, 바늘, 실이 그의 주요 소재로 등장한 것은 서양화를 전공했던 그가 평면작업에 대한 의문에 사로잡혀 있던 1983년이다. 어머니와 함께 이불을 꿰매던 유명한 일화에서 작업의 영감이 촉발됐다. "이불보라는 씨실과 날실로 엮인 평면에 수직으로 바늘이 꽂힌 순간 일순간에 몰려온 천과 바늘, 실과 바늘의 관계에 대한 깨달음은 충격적이었어요." 의미를 확장시키면 이불보는 몸을 누일 수 있는 장소이자 또 하나의 피부, 나아가 대지와 자연으로 은유된다. 바늘이 우리 몸의 추상적 오브제라면, 실은 마음 흐름의 상징체다.
"바늘과 실, 그리고 보따리는 이 같은 상징성을 갖기 때문에 민족적ㆍ지리적 특성 등으로 저마다 다르고 독특한 문화를 보편적 언어로 연결할 때 다양한 접근을 가능하게 하지요. '실의 궤적'은 '바늘 여인'의 대척점에 있는 작품이에요. 도큐멘트 형식이지만 내레이션은 없애고 이미지 콜라주 통해 서로 다른 문화와 실체를 병치시키면서 세계를 인식한 작품이죠." '바늘 여인'은 1999년부터 도쿄, 상하이, 델리, 뉴욕, 파리 등지에서 군중 속에서 등을 돌리고 서있는 영상으로 여기서 바늘은 작가 자신을 비유한다.
그의 또 다른 신작은 11월 11일까지 광주비엔날레에서도 만날 수 있다. 뇌 손상으로 기억을 잃어가던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작업한 '앨범: 허드슨 길드'로, 뉴욕의 이주민 출신 60~80대 노인들을 한 명씩 호명하며 촬영한 영상이다. 이는 '바늘 여인'의 연장선에 있으며, 혼잡한 거리에서 자신을 스쳐 지나던 수많은 군중을 한 명씩 비춘 작업이다.
이인선기자 kel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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