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공간을 뭉뚱그리는 이름으로 작업실(작업장)이 있다. 그 공간은 넥타이보다는 땀 닦는 수건이 어울리고, 종이와 펜이 놓인 책상보다는 연장이 널려있는 허름한 작업대를 떠올리게 한다. 직장이 정적이라면 작업실은 동적이고, 일터가 포괄적이라면 작업실은 특정적이다. 한 직장 안에서 우리가 작업실이라 부르는 공간은 사무공간과 구분된, 특정 파트의 물리적 작용이 이뤄지는 공간일 경우가 많다. 작업의 성과는 아이디어의 새뜻함이 아니라 물건의 미끈함으로 평가되고, 그 과정은 계산보다는 감각 경험이나 직관으로 수행된다. 그 공간에서는 머리보다는 손발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활약하고, 입보다는 몸짓과 표정이 효과적인 소통 수단이 된다. 자의적인 구분일 수 있지만, 여기서 상정한 작업장이 그런 공간이다. 요컨대 그 곳은 육체적인 공간이다. 절박한 생계의 필요나 자아실현처럼 거창한 의미 바깥에 놓일 수 있는, 예를 들어 재미 삼아 아이 책꽂이를 만드는 주부의 아파트 베란다나 빈 방, 미국 드라마에 이따금 등장하는, 뭔가를 만들고 수리하는 차고 같은 곳이 나의 작업실이다.
그 공간은 이윤이나 (재)생산보다 작업의 과정을 우위에 두므로 모든 게 상품화하고 모든 행위가 전문화하는 이 자본주의 체제의 기획 바깥에 놓일 수 있는 공간이다. 자아의 확장처럼 뚜렷한 지향이 없으므로 공간 자체의 정체성도 모호한, 규정 너머의 공간이다. 물론 수행되는 주된 행위에 근거해- 공방이나 화실처럼- 그 공간에 이름을 부여할 수는 있지만, 여기서 그 이름은 어떤 내적 강제력도 외적 구속력도 없는 명목일 뿐이다. 머리로만 하는 일이 아니라면 뭐든 할 수 있고 가끔은 아무 것도 안 해도 좋은, 열심히 해도 되고 빈둥빈둥 흉내만 내도 좋은, 가상의 어떤 공간을 떠올려 보자.
낮에는 직장 생활을 하고 퇴근한 뒤 나무로 가구 만드는 일을 하는 한 40대 남자가 있다(고 치자). 고되지만 덧없을 때가 잦은 일상. 그는 하루하루의 결핍을 알량한 월급으로 메우며 그럭저럭 버텨가는 고만고만한 사람이다. 몇 년 전 그는 마음 맞는 친구들과 서울 변두리 집 근처 허름한 지하실에 가구 작업실을 꾸몄다. 재미로 시작한 일에 조금씩 실력과 자신감이 붙으면서 그는 그 일이 훗날 제2의 직업이 될 수도 있고, 아니어도 노년의 세월을 덜 허전하게 해 줄 소일거리는 되리라 기대하는 눈치다. 그가 인터넷 블로그에 끄적거려 둔 낙서 같은 일기 몇 토막이다.
#밤을 위해 낮을 견디는 사람이 있고, 낮을 위해 밤을 보내는 사람이 있다. 나는 대체로 전자(前者)다. 마르크스가 들었다면 혀를 찼겠지만,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면서 그 일이 의미 있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몰염치라고 주장한 이(조지 산타야나)가 있었다. 그의 냉소가 요즘 내겐 위안이 된다. 이 공간(작업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다.
#늦은 밤, 텅 빈 작업실에서 대패를 들고 놀았다. 벌 주는 선생님처럼 단호하게, '내가 웃을 수 있을 때까지...' 라는 단서를 달고 시작한 대패질. 깎여나간 대팻밥들이 거치적거릴 즈음이면 대패질에도 리듬이 생기고, 그 리듬을 깨기 싫어 몸짓- 대패질은 팔만이 아니라 상ㆍ하체와 허리가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가능한 전신노동이다-을 멈출 수 없게 된다. 20분쯤 뒤 문득 대패질을 멈추고 히~죽 웃었다. 뭔가가 있어서 웃는 게 아니라 그냥 웃게 되는, 얼굴이 먼저 웃고 마음이 따라가는 육체적인 웃음. 그 사이 부재(部材)로 쓸 나무들이 제법 반반해졌고, 그 나무처럼, 내 삶도 세상도 조금은 만만하게 느껴진 까닭일까.
이런 구절도 있다. "이따금 나는 이 지하 공간이 산소실 같고, 수술 환자의 회복실 같다. 또 어떨 땐 세상의 모든 관계로부터 나를 분리시킬 수 있는, 사이 공간 같기도 하다. '관계의 미학은 사이의 미학이고, 사이가 무화(無化)될 때 관계는 억압이 된다'든가 하던 어떤 시의 한 구절을 떠올리고 있다."
그의 작업실은 허름하고 어수선하다. 몇 대의 목공 기계들이 있어 제법 그럴싸해 보이지만, 톱밥과 먼지 구덩이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연필이며 끌, 대패 등 손 공구들 꼴에서는 전문 작업공간이 지녀야 할 정돈된 규율을 느끼기 힘들다. 규율과 질서는 안전과 효율의 전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작업을 하다 보면 금세 이리 돼요. 작업 마치면 대충 정리를 하지만 지금처럼 살짝 어질러져 있는 게 오히려 편해요. 마음이 여유로워지거든요."
-힘들고 위험해 보인다.
"비용이죠. 행복이나 보람 성취감 같은 좋은 기운을 얻기 위한 일상의 포트폴리오 투자 비용."
-위험한 일에는 군기(?)가 필요할 텐데.
"여유와 느슨함은 다를 거예요. 작업할 땐 당연히 군기 들죠. 방심하면 다치니까."
-그래도 다칠 텐데.
"있죠. 서두르다가 몸이 마음을 못 따라가서 다치기도 하고, 방심을 여유로 착각해서 다치기도 하고, 또 너무 집중해서 다치기도 해요. 몰두하다 보면 공구가 내 손 같아 칼날이 대수롭잖게 보이는 거죠. 연장은 손의 연장(延長)이라잖아요. "
그런데 재미? 육체적으로 버겁고 기술적으로 막막해 중간에 내팽개치고 싶어질 때도 있지만, 아무나 붙들고 자랑하고 싶을 만큼 뿌듯해질 때도 있다고 그는 말했다. 머리로 디자인한 무언가가 손과 나무의 작용-반작용을 통해 조금씩 변형되면서 구체적인 형태를 찾아가는 과정, 완성된 가구가, 예쁘든 밉든, 세상에 나와 충실히 제 기능을 발휘하는 순간의 감동을 그는 전해주고 싶어 애달아 했다. "첫 디자인대로 가구가 만들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변수가 많거든요. 나무가 말을 안 듣기도 하고, 손이 엉뚱하게 움직이기도 하고…, 어떨 땐 손과 나무가 디자인을 한다는 생각, 머리를 비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그럴 땐 짜증스럽지만, 또 어떨 땐 그게 전화위복이 되기도 해요. 세상 사는 게 생각처럼 안 된다는 말에 '빨간 머리 앤'이 그러잖아요. '와, 멋진 걸! 생각지도 않은 일이 막 생긴다는 거잖아!'."
그는, 머리가 뭐라 하든 작업실의 최종 결정권자는 손과 연장이라고, 작업한 걸 죄다 버리고 새로 시작할 생각이 아니라면 손을 따라가는 도리밖에 없다고도 했다.
#드물긴 해도, 나무와 내가 밀착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빈틈없이 포옹한 채 서로를 어루만지고 있는듯한 느낌, 함께 조금씩 더 황홀한 높이로 떠오르고 있다는 느낌! 그런 느낌은 작업을 순조롭게 마무리한 뒤, 모든 여분의 에너지를 방전한 뒤의 공백 속으로 스미듯 찾아온다. 중독성 쾌락!
노동의 치유력, 특히 기술이 수반된 손 작업이 정서에 기여하는 바를 설득력 있게 주장해 온 이 가운데 에릭 호퍼가 있다. 빈민 노동자 출신의 이 철학자는 만년(1983)에 쓴 자서전에서 "실질적인 생활은 일(직업적 일)이 끝난 뒤에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의미 있는 생활은 배우는 생활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하는 데 몰두해야 해요. 나는 기술 요법이 신앙 치료나 정신 의학보다 중요하다고 믿고 있어요." 그는 숙련공들이 제 기량을 보여주고 흥미를 보이는 이들에게 그 기술을 가르칠 수 있는 공간이 도시마다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나치즘과 광신적 종교운동, 민족운동 등 열정적 대중운동의 공통적 속성을 파헤친 그의 역저 에도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그는 "현대에 수공예가 쇠퇴한 것이 어쩌면 좌절감이 상승하고 대중운동에 호응하는 개인이 증가하게 된 원인일 수 있다"며 "자기 손 안에서 나날이 세계가 성장하는 것을 보는 것만큼 자신감을 떠받쳐주고 자신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도 없다"고 썼다.
사이 공간으로서의 작업실이 사치스러워 보일 수도 있겠다. 먹고 사는 일에 온통 매달려도 하루가 모자란 이들, 아예 일이 없어 생계가 막막한 이들에게 저런 작업실은 '여유'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작업실이 특별한 물리적 공간일 필요는 없다. 방이나 마루 한 구석이어도 되고, 책상이나 밥상이라도 상관 없다. 다만 일과 일상의 관성에서 벗어나 각자가 좋아하는 무언가-그것이 뭐든-를 손으로 할 수 있는 공간이면 되니까. 정말 필요한 것은 물질적 여유가 아니라 심리적 여유다.
저 공간이 또 누구에게는 막연히 멋져 보일지 모른다. 마음은 끌리지만 덤벼 볼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이들, 특별한 용기나 재능, 그리고 긴 시간을 써야 얻을 수 있는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작업실은 소수의 특별한 공간처럼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전문적일 수는 없고, 또 끝내 전문적일 필요도 없다. 기술이나 도구 재료 등에 대한 정보는 널려있으니까. 필요한 것은 결단과 얼마간의 계획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꿈이다. 공간을 꿈꾸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삶을 견딜 만하게 해준다.
최윤필 선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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