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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길위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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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길위의 인생

입력
2012.09.14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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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되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눈은 떴으나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몸은 왜인지 일어나지질 않았다. 악몽에 시달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몸이 좋지 않아서인지 모르겠다. 그대로 한참을 누워 있었다. 그러다 발가락 끝이 움찔하고 움직이면서 굳어진 몸에 피가 돌면서 몸이 훈훈해지며 이불에서 빠져나왔다. 시간을 보니 언제나처럼 게으른 나는 오늘도 늦었다.

이도 닦지 않고 서둘러 나왔다. 지하철의 화장실에서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화장실의 거울은 내 얼굴을 비치는데 내 모습은 영락없는 노숙자다. 갈 곳도 많고 할 일도 많은데 무기력한,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나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그냥 밉기만 하다. 지하철 안에는 온통 최신 휴대전화를 갖고 묵묵히 있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들도 나처럼 무기력해 보인다. 슬프다. 그들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 휴대전화를 꺼버리고 오늘은 그냥 하릴 없이 보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발걸음을 돌려 지하철에서 내려 김밥집으로 간다.

술 때문에 쓰린 속을 달래줄 떡라면을 먹고 나와 다시 길을 걷는다. 원래 걷기를 좋아하는 나는 그저 걷기만 한다. 걷다보면 이런 저런 생각들을 떨쳐버릴 수 있어서 걷는 것을 좋아한다. 걷는다, 계속. 직진, 좌회전, 우회전, 이리저리.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으니 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없다. 아무것도 안 한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은 가벼워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아침에 굳어서 안 움직이던 내 다리와 몸은 이제 자유가 됐다.

얼마나 걸었을까. 막상 할 일이 없는 나는 심심해졌다. 저 멀리 공중전화가 보인다. 공중전화로 전화를 해본 지가 언제던가. 50원이던 때가 내 기억의 마지막이다. 요즘 공중전화는 얼마나 하지? 100원짜리 동전을 하나 넣어본다. 전화 걸 곳도 없고 외우고 있는 번호도 별로 없다. 결국 습관적으로 집에 전화를 건다. 동전이 찰랑 하고 전화기 속으로 들어간다. 딸의 목소리가 들린다. 할 말도 없는데 그냥 뭐 하냐고 묻고 전화를 끊는다.

공중전화의 요금은 70원이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니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 남은 30원은 반납되지 않으므로 수화기를 전화기에 올려 놓곤 공중전화를 나온다. 계속해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저 전화의 30원을 누군가가 쓸 때까지 저 전화는 얼마 동안을 기다려야 할까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좋다. 오늘은 이렇게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기로 결심한다. 아니 새롭다 할 수도 없다. 편리한 생활에 익숙해져 잊었던 것들을 찾아보기로 한다.

서울 종로 파고다 공원에 도착하니 여전히 노인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다. 그 옆의 골목을 찾아 들어간다. 난 이 골목이 좋다. 어르신들이 가득한 이곳이 좋다. 체인점인 커피가게들, 패스트푸드점 등 젊은이들의 공간은 점차 늘어가고 어르신들이 갈 곳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 이 골목은 어르신들의 세상이다. 막걸리, 전, 국밥 등 이곳은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가장 기분 좋은 것은 어르신들에게 3,000원이면 속을 따듯하게 덥혀 줄 국밥 한 그릇을 먹을 수 있다. 처음 와 본 것은 아니지만 밥값은 얼마가 적당한지 생각하게 되었다. 어디서 밥 한 끼를 먹으려면 5,000원은 줘야 하는데 여기는 3,000원이다. 아니 더 저렴한 것도 있다.

얼마나 따스한 곳인가. 기분 좋게 그 골목을 빠져 나오려는데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진다. 우산도 없는데. 어느 식당의 문간에 선다. 식당에서 뉴스가 흘러나온다. 어느 대통령 후보가 복지에 관한 공약을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르신들은 막걸리에 김치를 드시며 그 뉴스와 함께 잔을 기울인다.

차라리 잘됐다. 오늘은 비를 맞자. 비를 맞으며 집으로 간다. '그래도 난 얼마나 행복한 인생인가. 월세라도 집이 있으니 갈 곳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종로 뒷골목 노인들의 모습이 내 눈앞을 스친다. 10년 뒤에 20년 뒤에 난 어디 가서 내 인생을 보내야 하는가.

박근형 연극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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