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싱은 남자들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이 사라진 지는 오래됐다. 그렇지만 여전히 여성 드라이버를 향한 편견은 남아있다. 전난희(31ㆍ팀챔피언스)와 박성은(28ㆍSL모터스포츠) 듀오는 이런 편견들마저 깨트리기 위해 당찬 출사표를 던졌다. 여성 레이서 최초의 우승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하겠다는 각오다. '용감한 그녀들'을 13일 경기 용인 SL모터스포츠 캠프에서 만났다. '거만한 경쟁자'들을 겨냥한 통쾌한 외침으로 트랙의 반란을 예고했다.
여성 드라이버 최초 우승 도전
박성은과 전난희는 연예인이라 주목 받는 일부 여성 드라이버와 달리 기량으로 당당히 인정 받고 있는 실력파다. "방향을 틀 때 일반인은 핸들로 조정하지만 우린 액셀과 브레이크를 이용한다"는 설명에서 '프로의 향기'가 느껴졌다. 아주자동차대 모터스포츠학과를 졸업한 뒤 헬로모바일 슈퍼레이스 챔피언십 넥센 N9000 클래스에서 발군의 드라이빙 솜씨를 뽐내고 있는 둘은 지난 7월21일 끝난 4전 경기에서 나란히 포디엄에 올라 레이싱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박성은이 0.719 초 차로 뒤진 2위, 전난희가 3위를 차지한 것. 프로 레이싱 10년 역사상 여성 드라이버가 포디엄에 함께 올라간 건 처음이다.
이제 둘은 여성 레이서 최초로 우승에 도전하고 있다. 박성은은 "상위 5명은 비슷한 레벨이다. 누구나 우승할 수 있다"며 "경기 당일의 차량 상태와 드라이버의 컨디션에 따라 우승 향방이 갈린다. 올 시즌 남은 2경기에서 우승에 도전하겠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쇼트런의 여제'라 불리는 박성은은 한 바퀴 랩타임으로 순위를 가리는 예선에는 항상 1~3위를 차지한다. 전난희는 "체력적으로 여성들의 한계는 있지만 N9000 클래스에서 우승을 못할 이유는 없다. 4전 끝난 뒤 성은이에게 다음에는 1,2위를 하자고 했다"고 활짝 웃었다.
'털털한 그녀'의 포커페이스 변신
박성은과 전난희가 포디엄에 오르자 "남성 드라이버들은 다 죽어야 한다"는 우스개 소리가 나돌았다. 여전히 남아있는 여성 드라이버에 대한 편견 때문. 전난희는 "여성들이 아무리 해도 남성을 이길 수 없다는 편견이 팽배한 게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여성 드라이버의 일거수일투족이 순식간에 퍼지는 레이싱계라 행동과 이미지 관리도 필수라고 한다. 이로 인해 털털하고 감정 표현에 충실한 전난희와 박성은도 '포커페이스'가 됐다.
박성은은 "이전에는 몰랐는데 트랙에서의 이미지 관리가 중요하다. 없는 말까지 만들어져 소문으로 퍼지는 곳이다. 흠집 잡히지 않기 위해 레이싱에만 집중하는데 노력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터무니 없는 낭설과 차가운 시선 탓에 둘은 남몰래 눈물도 쏟아냈다고. 전난희는 "연예인 드라이버는 처음에는 주목 받지만 실력이 없으면 아무도 봐주지 않는 냉정한 세계가 바로 이곳이다. 트랙에 들어서면 여자로 보지 않는다. 철저히 성적으로 평가 받는다"라고 강조했다.
피겨 선수, 가구점ㆍ미용실ㆍ옷가게 사장 독특한 이력
국내에서 레이싱을 본업으로 삼는 전문 드라이버는 10명 안팎. 대부분 자비를 털어 비용을 충당한다. 박성은과 전난희도 생업이 따로 있는 '투잡족'이다. 전난희는 가구점, 박성은은 헤어샵과 옷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2007년 프로 레이싱에 입문한 박성은은 "매년 수 천 만원을 대회 출전을 위해 투자했다. 그 돈을 모았으면 아마 오피스텔 정도는 마련하지 않았을까"라고 소탈하게 말했다. 전난희도 "없는 시간을 내고 물질적으로 투자했기 때문에 이 정도 수준에 올라올 수 있었다"라고 덧붙였다.
박성은은 "경쟁자를 이기기 위해서 연습을 한 번이라도 더 해야 한다. 하지만 다른 직업이 있다 보니 주말에 연습하는 게 전부"라고 아쉬워했다. 피겨 선수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도 눈길을 끈다. 박성은은 중학교 때가지 피겨 대표 선발전에 출전할 수 있는 5급 자격까지 따는 등 피겨 유망주로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선배 중 하나가 척추를 다치는 대형 사고를 본 부모님의 만류로 '피겨요정'의 꿈을 접었다. "아버지가 김연아만 나오면 우신다"라는 농을 던진 박성은은 "피겨를 그만둔 것에 후회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닌데 레이싱을 할 때는 잘 하고 싶어서 여전히 떨린다"라고 레이싱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레이싱의 가장 큰 매력은 스피드가 아니라 액셀과 브레이크 등을 조작하면서 느끼는 스릴이다. 발부터 머리 끝까지 쭈뼛 선다"는 전난희는 "나중에 성은이와 함께 아주자동차대학 레이싱팀을 만들어 운영하는 청사진도 그리고 있다"는 포부를 밝혔다.
국내 최대 자동차 경주대회… 여성 드라이버 5명 활약
● 슈퍼레이스 챔피언십이란슈퍼레이스 챔피언십은 한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경주대회로 국내 최대 규모의 모터스포츠 이벤트다. 슈퍼레이스의 클래스는 배기량과 개조범위, 참가차량에 따라 나뉜다. 참가 선수층에 따라 챔피언십 3종목(슈퍼 6000클래스, ECSTA GT 클래스, 넥센 N9000 클래스)과 원메이크 챌린지 1종목으로 진행되고 있다. 박성은과 전난희가 참가하고 있는 N9000클래스는 배기량 1,600㏄의 차량으로 경기를 펼치고, 프로 레이서의 진입 등용문으로 불린다. 이 클래스에서 권봄이(바보몰닷컴), 이화선(CJ레이싱), 고명진(EXR team 106)을 포함해 총 5명의 여성 드라이버가 활동하고 있다. 슈퍼레이스는 총 7전으로 챔피언을 가린다. 6전은 16일 태백레이싱파크, 마지막 7전은 10월14일 영암 코리아 인터내셔널에서 열린다.
용인=김두용기자 enjoysp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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