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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5. 하늘과 땅과 사람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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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5. 하늘과 땅과 사람 <120>

입력
2012.09.13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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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행수와 손 행수는 각자 거처하던 곳을 떠나 성안 장터거리로 나와 이신통이 마련한 주막의 내외 방에서 하룻밤 유숙하며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습니다. 시골 주막의 내외 방이란 대개가 곡식이나 메주 등속을 보관하는 골방이기 십상인데 다른 손님들과 부딪칠 일이 없어 안전하기도 합니다. 이신통은 먼저 율봉 역말에서 나와 방을 잡아놓고 솔뫼로 찾아가 손 도인께 알린 다음에 장터 초입에 있는 목로에서 서 행수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그때에 이 서방은 자신에게 기찰이 붙었다는 것을 아지 못하였지요. 나중에 서 행수가 잡힌 뒤에야 누가 지목한 것인지 알려졌습니다. 이 서방에게는 일찍이 의절하다시피 하고 집을 나간 이복형이 있었답니다.

네, 이준이라고 청주 목에서 비장 직을 얻어 한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그이가 이신통 집안의 큰댁 소생으로 이복 남매를 종모법에 따라서 외갓집 노비로 추쇄하려 했다는 사실을 신통의 누이 덕이에게서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네, 그 사람이랍니다. 갑오년 난리 끝난 뒤에 제가 고향을 떠나서 이곳으로 정처 없이 흘러들고 다시 두 사람과 만나서 자세한 전말을 들었지요.

박 선비는 그가 기억하고 있던 당시의 이야기를 달과 해가 저물고 떠오르듯 순서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준은 그날 삼현육각이 울리고 퇴청 시각이 된 뒤에 관문을 나와 성안 장터거리로 갔다. 겨울 저녁 해가 재빨리 기울어 벌써 사방은 어둑어둑했고 민가의 창문에는 따뜻한 불빛이 밝혀지고 있었다. 그는 읍내의 유지인 향소 별감과 약조가 있었는데 새해가 오면 신임 목사가 올 것이라 관내 현의 밥술깨나 먹는 부자들에게 신구 목사의 전별비와 부임비를 할당하려는 논의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외직은 삼 년 기한이었으나 요즈음 세상에서는 어찌된 노릇인지 반년도 못가기 일쑤고 이번에 일 년 반을 머문 청주 목사는 제법 오래 임지에 있었다고 아전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청주에 그래도 먹을 것이 제법 있었던 모양이라는 거였다.

장터거리는 한산했는데 파장이 훨씬 지난 저녁나절인 데다 날씨도 제법 추웠던 것이다. 그는 듬성듬성 행인이 오르내리는 장거리를 걷다가 문득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덧저고리 차림의 장돌뱅이 비슷한 자를 바라보고는 저도 모르게 옆의 전을 향하여 몸을 돌리고 물건을 살피는 척하였다. 장돌뱅이가 그의 등 뒤를 지나쳐 갈 때에 이준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고 이내 알아보았다. 아우 이신통이 틀림없었다. 이준은 처음에는 아무 생각도 없이 쫓아가서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반가운 말을 던지려던 참이었다. 신통이 두리번거리더니 방향을 돌려 마주 오고 있었다. 이번에도 준은 아우를 아는 체하지 못하고 몸을 돌렸고 신통이 지나갔다. 준은 자기가 어째서 아우를 순간적으로 피해버리는지 그 연유를 잠깐 생각해보았다. 부친 이의원의 격노한 얼굴이 떠올랐고 이준은 같은 또래의 외숙에게 이복동생인 신이 덕이가 외갓집 교전비의 소생임을 말하면서 노비송사를 부추겼던 일이 떠올랐다. 그는 아우가 과거를 본다며 한양에 올라갔다는 소문은 전해 들은 적이 있었고 무슨 연고인지 장가를 들고도 고향에 돌아오지 않고 의원도 매제 송생에게 물려주게 하고는 계속 떠돌며 살아간다는 얘기도 들었다.

청주목 관아에서는 그동안 천지도의 번성 때문에 상관의 추달이 자심하여 전에 서학 교도들을 잡아들이던 사람들을 재편성하여 군교로 들이고 전담시키고 있던 시절이었다. 목의 비장인 이준은 잠깐 토박이 관아치로서의 호기심이 생겨났다. 도대체 저 녀석이 무슨 일로 청주에 나타났으며 누구를 만나려는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는 신통의 뒤를 밟아 가다가 그가 장터 초입의 목로에 들러 요기 겸하여 탁주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분명히 누군가와 만나기로 약조했음을 눈치챘다. 아니라면 그는 숙소를 잡든지 봉노에 들어 여러 행객들과 겸상을 받아먹었을 터였다. 이준은 목로가 내다보이는 건너편 전방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마른 나물에 버섯 호두 잣 대추 곶감 같은 견과물에 건어물 등속을 맷방석과 채반에 그득히 쌓아두었는데 그도 알 만한 장사치의 가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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