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69) 전 독립기념관장은 권력과의 싸움에 이골이 난 사람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끌었던 신민당에서 당보(민주전선)를 만들었고, 이후 전두환 신군부세력이 등장한 뒤에는 역시 야당인 평민당보(평민신문)의 편집을 맡았다. "아이들 자는 밤에 구둣발로 문을 차며 들어온"기관들에게 자료를 뺏기고,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도 당한 20년의 수난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에 보상 받는 듯도 했다. 하지만 다시 정권이 바뀌면서 독립기념관장 자리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물러나야 했다.
그가 몇몇 독립기념 관련사업 자문, 강연 등 돈 안 되는 일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해 매달리는 일이 있다. 평전 쓰기다. 1996년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박열 평전> 으로 출발한 그의 평전 저술은 한동안 뜸했다가 2004년 독립기념관장 재직 때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1, 2권씩을 쏟아내는 말 그대로 초인적인 작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낸 평전은 모두 17권. 책과 자료를 찾아 읽을 수 있고 원고지에 글을 쓸 수 있을 때까지 계속 평전을 낼 셈이니, 평전 분야에서는 지금까지는 물론이고 아마 앞으로도 국내 저술가 누구도 깨지 못할 기록이 될 것이다. 후대를 위해 역사적인 인물을 조명해가다가 "그 사람들의 행적에서 자신의 삶의 지향점을 찾게 됐다"는 그를 최근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만났다. 박열>
-평전을 왜 이렇게 열심히 많이 쓰십니까.
"어려웠던 시절에 민족적 역사적인 소명의식으로 역사에 충실했던 분들, 그러면서 자신의 신념과 사상을 행동으로 옮긴 분들에 대한 기록을 제대로 남겨놔야겠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외국 특히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평전이 문학의 한 장르로 활발하게 나오고 독자층도 넓지만 우리나라는 그런 것이 없잖아요. 동양의 사서인 사마천의 <사기> 130편 중 70편이 (인물)열전이고, <플루타르크 영웅전> 같은 고전에서 보듯 서양에서도 문학의 대표적인 장르가 전기물이나 평전입니다. 플루타르크> 사기>
제가 30대 때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참 좋아했어요. 그래서 한번 연구해봐야지 하고 열심히 책을 사 모으고 읽었지만 와 닿지가 않았는데, 역사학자 E.H.카가 쓴 도스토예프스키 평전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어요. 도스토예프스키의 그 많은 역작을 평전 한 권에 녹인 것을 보고, 바로 이거구나 싶어서 평전 작업을 준비하게 됐죠. 그때가 30대 초반인데, 나이 60이 될 때까지 한 20~30권 써야지 하고 독립운동가 평화운동가 민주화운동가들로 25~30명 정도를 정했어요. 그 후 1990년대 들어 정치인으로 노무현과 김근태, 언론인과 학자로 리영희 송건호 박현채 선생을 추가했는데, 우연인지 다들 돌아가셨죠. 박현채 평전은 10월에 나옵니다. 지금은 김근태 평전을 쓰고 있습니다."
-평전의 인물을 고르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독립운동가, 그 중에도 가장 치열하게 살고 자기 사상이 있는 분입니다. 평화운동가나 민주화운동가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런 기준에서 봤을 때 지난주에 나온 이승만 평전은이례적이군요.
"놀라운 것이, 우리나라에 이승만을 연구하는 사람이 많고 책도 한 30권 나와 있지만 이승만의 행적을 어떻게 그렇게 모르는 건지, 숨기는 건지 저는 참 의아스럽더라고요. 그런 것을 보고 분노해서 평전을 쓰게 된 거에요. 제가 4ㆍ19를 겪은 세대이다 보니 이승만에 대해서는 30대 때부터 회색으로 봤지요. 연구자들을 만나고 미국 가서 자료도 입수했는데, 이승만이 미국 체류 40년 동안 독립운동 했다는 것은 사실과 달라요. 한마디로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1912년 미국에 갈 때 친일파 미국인 목사의 주선으로 일본인 여권을 받아 나갔고, 미국에서도 독립운동에는 관심이 거의 없고 YMCA 같은 데서 선교 활동을 주로 했어요. 상해 임시정부에서 탄핵을 받고 ?겨나자 임정을 거세게 비난하고, 미국에 임정을 하나 더 만들려다가 교포들이 워낙 반대하니까 접어버리는 등 독립운동 진영에 불화를 일으켰죠. 워싱턴포스트에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으면서 활기찬 나라가 됐다는 글을 기고하고, 윤봉길 의사에 대해서는 조선인이 테러리스트로 낙인 찍혀서는 안 된다며 그런 활동을 못하게 임정에 편지를 쓰고. 하와이에서 30년 살 때는 일본공사관하고 굉장히 가깝게 지냈어요. 당시 임정 대통령이면서 교포 2, 3세를 뽑아 일본공사관 여권과 비자를 받아 조선 견학을 시켰어요. "
-박정희 평전을 쓸 생각은 없습니까.
"박정희 평전은 보수와 진보 양쪽에서 많이 썼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상당히 잘 쓴 평전으로 정치학자 이현희 전인권 같은 분의 것도 나와 있고 해서 생각이 없습니다. 조갑제씨가 쓴 거야 영웅신화이고.
박정희를 시해한 김재규, 백범을 암살한 안두희 평전을 쓸 생각은 있습니다. 안두희는 보통 사람이 아니거든요. 이승만 때 서북청년단 간부이고 재일동포 북송선을 침몰시키려다 일본에서 검거되기도 했던 인물인데, 그런 사람이 백범을 암살하고도 무사했으니까요. 김재규 그 분도 참 복잡한 사람이더라고요. 박정희 시해 사건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사건과 미국의 관련 여부, 김재규가 박정희 독재에 반대하다가 의문사한 장준하 선생과는 어떤 관계로 가까이 지냈는지 등 밝혀져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
-12월 대선에 출마하는 박정희의 딸 박근혜 후보의 역사관을 둘러싸고 논란이 많습니다. 5ㆍ16과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의 역사적 평가를 후대에 맡기자는 박 후보의 발언을 어떻게 보십니까.
"지극히 무책임한 이야기이고 자기 회피라고 생각합니다. 5ㆍ16 쿠데타가 난 지 50년, 유신이 일어나고 40년이면 지금은 역사거든요. 당대를 증언하지 않고 비판하지 않으면서 역사를 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세계적인 역사가들은 모두 당대의 비판적 시각으로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그동안 쓴 평전 중에 유독 기억에 남는다거나 쓰면서 생각이 남달랐던 것은.
"다 애정이 가지만, 첫 번째로 쓴 독립운동가 박열 평전입니다. 일본왕 부자를 폭살하려다 검거된 스물 두 살 노동자가 일본 법정에서 보여준 기개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는 조선의 대표이고 판사는 일본 대표이니 피고석과 판사석을 똑같이 하라' 등 네 가지 요구를 했는데, 정말 당당했지요.
또 하나는 반민특위위원장을 지낸 김상덕 선생 평전입니다. 이승만의 죄업 중 하나가 반민특위를 짓밟은 것입니다. 선생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후 귀국해서 제헌국회 의원과 반민특위위원장을 지냈는데, 자손들이 참 기구해요. 중국에 있을 때 부인은 병들어 죽고 막내딸은 굶어 죽고, 남은 딸과 아들은 6ㆍ25 때 선생이 납북되자 천애고아가 됐어요. 딸은 어느 집 양녀로 들어갔고, 아들은 떠돌아 다니다가 어렵게 야간대학을 나왔지만 취직이 안 돼서 평생 노동을 하며 지금까지도 어렵게 살고 있습니다. '아무개 아들' 이라고만 하면 면접에서 떨어진 거에요. 선생 같은 분의 자손이 왜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합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는 지금의 대한민국을 이성적인 국가, 도덕과 정의가 살아있는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이승만 박정희 살리기가 더 노골화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수구 보수 세력은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뿌리는 친일을 했고 분단과 6ㆍ25 전쟁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정통성이 없다 보니 이승만 박정희 같은 독재자를 업고 갈 수밖에 없는 거지요.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 명시된 임시정부 법통과 4ㆍ19 정신을 뒤집은 것이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 세력인데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니 이승만 박정희를 우상화하는 거지요."
-11월 말 개관하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도 말이 많습니다.
"건립추진위원 명단을 보니까 주로 관변 인사와 행정 관료들이고 현대사나 역사 전공자가 별로 없더군요. 그런 사람들을 중심으로 현대사박물관을 만드는 건 문제입니다. 충분히 논의하고 국민적 합의를 거쳐야 뒤탈이 없는 건데, 대통령 임기 내에 마치려고 졸속으로 해서 되겠습니까. 몇 천억원 예산이 들어가는 사업인데. 독일은 20~30년 동안 준비하고 합의를 구해서 현대사박물관을 세웠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격해지고 있는 한일 갈등을 어떻게 보십니까.
"독도 방문과 일왕 사죄 요구 발언 등으로 일본을 자극했던 분이 며칠 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 총리와 만나서는 (한일 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가겠다고 한 것을 보면, 대통령이 외교 정책이나 국가 경영, 한일 관계에 대해 기초적인 인식도 없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독도는 우리가 영토 주권을 행사하고 있고 역사적으로도 우리 땅임이 명백한 만큼 현상 유지가 중요하지, 그것을 쟁점화해 국제사회에 떠벌리고 다니는 것은 대단히 서투른 곡예라고 봅니다. 그보다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군비 강화, 일제 때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들이 못 받은 돈, 일본에 널려 있는 우리 문화재 등 실질적인 문제들을 제기하고 일본에 정당한 요구를 해서 관철시켜야 합니다. 독도 방문 같은 쇼맨십으로 국민의 민족주의를 강화하려는 것은 천박합니다. 이런 식으로 외교를 하면 안 됩니다."
-2만 5,000여권의 책을 소장한 애서가로 유명하십니다. 평전 자료를 찾아 매주 헌책방에 가신다고 들었습니다만.
"헌책방은 제가 1970년대 야당 기관지 '민주전선'을 만들던 때부터 다녔어요. 당시 신민당 당사가 있던 관훈동에 헌책방이 여럿 있어서 귀한 자료들을 구할 수 있었죠. 요즘은 헌책방이 많이 없어지고 새로 나오는 자료도 거의 없지만, 가끔 희한한 자료를 구하기도 해요. 얼마 전에는 1970년대 여성 노동자의 일기장을 구했어요. 초등학교도 안 나온 젊은 여성이 그림 그리듯 서툰 글씨로 쓴 건데, 아주 애절한 부분이 많아요. 책방 주인이 가치를 잘 몰라서 덕분에 싸게 샀죠. 2, 3년 전 나온 신간을 싸게 사기도 하고."
-최근 벌어지는 여러 가지 역사 문제를 보면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져야 할 역사 의식은 무엇일까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나라는 망했어도 역사를 지키면 언젠가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신채호 박은식 같은 분은 직접 역사책을 쓰셨지요.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바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 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불과 100년 전의 일제 침략, 해방 후 60년 사이에 벌어진 전쟁과 이승만 박정희로 이어지는 32년간의 독재 등 최근의 역사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되돌리려는 수구 세력이 다시 권력을 잡는다면 이는 후대에 죄를 짓는 일입니다. 옛날 역사를 드라마로만 볼 것이 아니라 현대사를 제대로 봐야 합니다.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선조들처럼 하지는 못하더라도 역사에 미안한 일을 남기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플루타르크는 '역사적 인물을 후대를 위해 조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행적에서 자신의 삶의 지향점을 찾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바로 제 이야기구나 싶습니다. 저는 제가 쓰는 평전 주인공들의 삶에서 제 삶의 지향을 찾아왔습니다. 그게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대사 인물 평전을 쓰시게 된 것이 저널리스트적 시각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입니다.
"네, 세상이 평탄하고 운이 좋았다면 장준하 선생이 만든 잡지 <사상계> 에 들어갔을 거에요. 제가 20대 초반에 <사상계> 신인 논문상에 당선됐거든요. 그런데 장준하 선생이 그만두고 <사상계> 가 강제 폐간됐어요. 당시 사장이던 분이 야당인 신민당으로 가서 당 기관지인 '민주전선'을 만들 때 기자로 들어갔지요. 편집국장이 되어 80년까지 그걸 만들었어요. 그때 저하고 야당 함께 한 분들이 삼선 사선 의원이 됐고, 제가 뽑은 기자들도 몇 사람 국회의원이 됐어요. 그렇게 오래 야당 기관지를 만들고도 국회에 들어가지 못했으니 제가 바보다 싶기도 하지만, 우리 역사가 정치보다는 평전 쓰라고 저에게 그런 일을 맡겼나 싶기도 해요." 사상계> 사상계> 사상계>
-정치인이 되셨다면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을 더 잘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조지훈이 쓴 <지조론> 에 나오는 조선시대 연산군 때의 야사를 말씀드리죠. 연산의 황음이 극에 달해 고관집 며느리들까지 농락하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한 부인이 연산의 부름을 받자 온 몸에 명주실을 감고는 연산에게 치욕을 당하면 이 명주실로 목을 매어 자결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궁에 들어가서는 스스로 명주실을 풀고 자리에 누웠다고 하지요. 그런 식으로 변절한 지식인, 언론인, 정치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권력의 복판에) 들어가서 고치겠다고 한 사람들 중에 실제로 그렇게 한 사람을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지조론>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김범수기자 bskim@hk.co.kr
김정은인턴기자 (숙명여대 정보방송학과 3년)
● 김삼웅은
1943년 전남 완도에서 태어났다. 20대 초반 <사상계> 신인논문상에 가작으로 입상했다. 논문 제목은 '공업개발 시대의 농촌문제'. 사상계 기자가 되고 싶었지만 1970년에 사상계가 김지하의 시 '오적'을 실었다는 이유로 폐간되는 바람에 꿈이 막혀버렸다. 1975년 함석헌 선생이 발행한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을 지냈다. 정부 비판 글을 많이 싣던 이 잡지 역시 1980년에 등록이 취소됐다. 씨알의> 사상계>
박정희 유신 체제에서 제1야당이었던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 의 편집장을 지냈다. 그때 데리고 있던 기자들 중에 지금 3, 4선 국회의원이 여러 명이다. 당시 한밤중 들이닥친 정보기관원들에게 수 차례 끌려갔지만 야당이라는 버팀목이 있어 큰 화를 당하지는 않았다. 1980년 신군부 세력에 끌려가 옥고를 치른 후 평민당보 <평민신문> 편집국장 및 주간을, 김대중 정부에서 4년여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주필을 지냈다. 평민신문> 민주전선>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말 공모를 거쳐 독립기념관장에 임명됐고 3년 임기만료 뒤에 우수기관장으로 1년 연임이 결정됐다. 연임 중 정권이 교체됐고 이후 보수 언론과 보훈처의 직간접적인 사퇴 압력을 느껴 2008년 3월 자진해서 물러났다.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제주 4ㆍ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고 단재 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이사,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자문위원 등을 맡아 보고 있다. 제대로 벌지 못할 때 생계를 책임져 주었으며 "책 사오는 것은 뭐라 하지 않는" 부인이 늘 고맙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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